▲거리를 거를때마다 책사(冊舍)가 눈에뜨인다. 세계 절작의 번역이 늘어가고 신진작가의 신간(新刊)도 늘어간다. 작지의 편집도 점점 주의를 끌어간다. 그러나 천주를 찬양하는 시집(詩集)이 인간의 도덕적 경향을 묘사한 작품이 몇이나 되는지? 그래도 <풀톤 쉰> 주교의 「영혼의 평화」의 원문 여가판이 우리나라서 많이 나가는 것을 보면 일반 독서인들이 요구가 무엇인가 짐직하고도 남음이 있다.
▲ 항조교파의 서점이 활기를 띠고 있음에 눈을 감을 수 없다. 영문판의 가톨릭 서적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과 접촉한 청년의 발거름이 어디로 향할 것인가 상상핧 때 주교좌 소재지에 가톨릭서점이 몇이나 되는가 반성 아니할 수 없다. 뜻있는 사제와 평신도는 자기가 사는 고장의 서점 실태를 한번 살펴 보는 동시에 가톨릭서적이 아주 없음이 아님을 재인식 할 것이다.
▲ 가톨릭서적중에서 일반독서계에서 보편적으로 읽어질 수 있는 것도 없지 않은대도 왜 한가지도 사회에 안나타나는가? 주일날 성당마당이나 사무실 처마 밑에 늘어노은 가톨릭서적 중에 사회에 내보내면 직작 팔렸을 것이 언제나 그대로 묵혀있음을 본다. 성당 담안에 감금되어있는 가톨릭서적을 사회로 해방할 생각을 분심이라고 집어치워버린 것인가?
▲ <주재용> 신부님의 「선유의 천주사상과 제사문제」는 아직도 살아있는 이 나라의 유교적 사고를 가톨리시즘으로 일보 전진케할만함이 <이 마두> 신부의 「천주실의」에 못지않다. <오경웅> 박사의 「정의의 원천」은 비단 법학통론에 그치지 않고 인간사고의 원천을 보여준다. <로겐돌프> 신부의 「가톨리시즘」은 현대지성인에게 다시없는 계몽이 된다.
▲ 「로오마」의 Holy Father(성부)께서 무어라고 명하셨던가? 『지식층으로 지도층으로!』 우선 항종파의 「기독교사상」이라는 월간을 손에 들어만 보라. 유물사관에서 파생한 경제학설의 저서를 그 저자와 제목만이라도 한번 보기만 해보라. 시급한대로 우리 희망을 「레지오 마리에」의 이동문고 활동을 기대아니할 수 없다. 「큐바」 「콩고」 「라오스」 「일본」 그리고 국내의 「노동」문제를 돌아볼 쌔 지성 전교가 참으로 시급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