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지은 성당이 바라보일 때 우리는 기쁘다. 들어가서 새 제대를 향할 때 고마운 생각에 머리가 수그러진다. 나와서 본당신부님을 대하면 그동안 겪으신 가지가지 고초를 위로해드릴 말이 없다. 어떤 성당은 공사가 몇번이고 좌절되었다. 어떤 신부님은 빚에 쪼달려 병세가 위독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끝장에는 낙성하고야 마는 것은 반드시 인력 이상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 새 성당에 새 교우가 늘어간다. 뜻밖의 인사도 입교한다. 오래 식었던 집안이 회두한다. 현대식의 설계가 편리하다고 수녀님이 좋아한다. 전교가 잘 되는 이상 그 외에 무슨 불평이 있으리오? 그러나 그러나 우리 욕심은 한이 없다. 사리(私利)를 위한 욕심이라면 버려야지마는 이것은 좀 딴 욕심이라 버릴 수가 없다. 다름이 아니라 성당의 모습과 제대의 양식과 성상의 효과 등에 관한 것이다.
▲ 「고딕」, 「바로쿠」, 「비싼틴」 등 구교나라의 전통은 물론 「인도」 「중국」 「일본」 등 전교나라의 민족적인 새 것이 있는가하면 「구라파」의 최신 현대식도 있다. 어느것이거나 잘 된 것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은 우리 마음에 『평안』을 준다. 안그런 것은 마음을 거북하게 한다. 『평안할지어다』라는 복음을 성당의 모습이 전하기도 하고 전하지 않기도 한다. 「고딕」을 보고 기도하는 돌이라고 일컫지 않는가?
▲ 「베토벤」의 「제9」로 신의 존재를 느꼈다는 고백도 있고 「미사 솔렏니스」에 통회로 떨리는 수도 있다. 이러한 걸작이라도 전례에는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이 원칙이 시각에 작용하는 아름답지 못한 건축양식에 거꾸로 적용될 것이다. 「구라파」에 가서 「고딕」을 보고 돌아와서 교회에 접근한 인사도 있다. 성당 설계의 신중성이 성가작곡의 경우에 못지 않다고 말하면 죄송하오리까?
▲ 진(眞) 선(善)에서 떨어질 수 없는 미(美)에 대한 세심(細心)한 결벽(潔癖)이 기도중에는 분심이 될 것이나 인간의 심미(審美) 본능을 기도로 이끌어 당기는 것이 사실이다. 모든 현재 신구(新舊) 성당의 내부 외부의 사진을 한데 모아 외국의 것과도 비교하면서 우리 전통과 생리에 어울리는 새 양식의 논의가 언젠가 한번은 있음즉 합니다. 건축미술에도 나타나야 할 천주의 영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