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가끔 무신론을 신문에 실리고 또 신앙을 조롱하는 글을 읽을 수 있다. 논증보다도 독성(讀聖)이요 독단인 글을 읽을 수가 있다.
「허수아비」를 믿는 어리석은 참새는 벌써 없다고 말했으며 2대대전을 겪은 오늘에 와서는 제4신앙(第四信仰)- 신없는 종교를 신봉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신의 시체(屍體)는 아직 남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신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런 문구(文句)는 새것이 아니고 <니체>의 낡아가는 「초인」(超人)과 거리가 멀지 않을 뿐 아니라 고대 철학사에서도 유물론적 세계관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태양 아래에 새것이 없다』는 격언과 같이 새로운 것이라고 신기해 할 것은 못된다. 요즈음 세계를 그들은 가톨리시즘과 공산주의의 독재적 「독마」의 대림으로서 핵(核)전쟁으로 몰고 들어가고 있음을 경고하고 두 「독마」적 세력을 말살한 조화된 「휴마니즘」으로 세계를 구출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 있어서 가톨릭과 공산주의의 양대 세계관적 대립을 우리는 부정하는 바는 아니다.
<니체>의 철학이 「나치시즘」의 어용이 되었던 사실을 예언할 사람이 있었던가? 또 하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불신앙적 자유주의가 「볼쉐이즘」을 낳을 것을 예견하였다는 사실이다. <토마스 아귀나스>의 주지주의(主知主義)를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理性)만을 긍정한 유리론(唯理論)은 모든 사상적 「아나르키-」를 빚어냈고 한 철학자가 새로운 한 철학을 만드는 현금의 사상계를 우리는 안타깝게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신을 부정하고 모든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은 다른 개인적 인기와 권위에 신앙 아닌 노예로 떨어지고 말것은 두말할 것이 없는 것이다. 글쓰는 그들 자신이 논증도 없이 독단해버릴 뿐 아니라 학자적 금도(襟度)도 없이 새 철학자들의 이름과 문구만을 나열하는 태도는 한심할 따름이다. 신앙과 전통을 배격하는 이론과 논증도 없이 논거없는 저항은 사상적 무정부주의를 가져오는 것이며 이것은 공산주의의 제물로 바치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말 것이다.
끝으로 <휴마니즘>이 어떻게 무신론에서 탄생하고 발육할 수 있다고 보는지 알 수 없다. 무신론적 사회와 계급에서 독재와 갖은 악제도(惡制度)가 나왔다는 역사는 우리가 아는 바이다. 모든 외교시대(外敎時代)에 노예제도는 공인되어 왔었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이런 비인간적 제도와 투재아였으며 모든 가정과 사회를 어지럽게 하던 일부다처주의(一夫多妻主義)를 격퇴시켰다. 그리고 저주받은 인간으로 취급당하였던 나병(癩病)과 불치(不治) 환자들에게 구호의 손길을 폈을뿐 아니라 집 없는 고아와 노년을 돌보는 아름다운 사회를 결실케 하였다. 그들의 생각이 과거의 노예제도나 인권을 짓밟던 시대도 신응 신봉하던 시대가 아니야고 반문할른지 모른다. 그러나 신의 개념이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대상과는 본질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인간중심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금일에 있어서 진정한 인간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금일과 같이 불안 고독에 떨어진 시대가 어디 있느냐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신과 멀고 신앙과 멀어지고 인간의 자율성(自律性)을 부르짖을수록 인간의 존엄성 행활의 의의를 상실하고만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어찌 할 것인가. 인간이 생애뿐만 아니라 하등(下等)의 생명까지 불가사의한 것으로 남았을 뿐 아니라 유물론자 <헤켈>의 제자로서 「활력론」(活力論)의 「거성」(巨星)이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 모든 문화, 예술, 종교, 이런 모든 정신적 가치환동을 물질운동이라는 공약수로 대치하려는 유물론에서 인간이 어찌 세계의 중심이 되는 것이며 인권과 의의를 찾으려고 할 것인가 모순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자연과학은 유물론을 뒷받침한다고만 생각하는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고 귀납형이상학(歸納形而上學)이란 새로운 방향이 있다는 것을 눈감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의 질서와 합목적성(合目的性)이던 것을 현금의 과학은 부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더한층 경이(驚異)를 가지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프로테스탄트」교파의 이름을 들고서 종교의 태도가 다 소위 「제사신앙」(第四信仰)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를 못읽은 사람의 생각이다 고대의 이단(異端)이 산발(散發)하였을 때에도 가톨릭은 오늘과 하나였다.
<루터>가 「오름스」국회에서 『나는 여기 있나이다. 이미 쏟은 물을 어찌 하오리까 하나님이여 도아주소서 아멘』하면서 끝까지의 투쟁을 약속하였을 때에도 가톨릭은 하나였다. 유명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하르나크>가 합리주의(合理主義)와 타협하고 성서의 기적을 과학적으로 해석할 때에도 새학설을 따를줄 모르는 교회였다. 새것이냐 묻지 않고 옳으냐 묻는 양심적 학자는 자기 발언데 책임을 지고 심각히 생각하라. (林和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