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명이 지상(地上)에 난다는 것으 인간사회에서는 하나의 「사실」로 보나 초자연사회에서 볼 때에는 뚜렷한 목적의사(目的意思_를 가지고 이루어진 창조주(創造主)의 「행위」인 것이다.
천주의 위대하신 계획 밑에서 인간으로 창조된 자가 모여사는 인간사회는 각자가 천주의 창조의사에 맞추어 살 수 있는 인간성을 조중하고 발전시켜 나가야하는 것이다. 인간은 창조주로부터 받은 인간성을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갈 권리와 의무를 지고 있다. 우리들은 이러한 관계를 인권 또는 자연권이라고 부르고 인권존중의 의무라고 불러왔다.
가톨릭은 인간사회가 인간으로서의 적성(威嚴性)과 정의와 공동선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일찌기 노예(奴隸)의 학대를 금하고 그 해방을 권한 것이나 유물사상과 공산사회를 선죄(宣罪)한 것이나 타태(墮胎)하는 것이나 법 앞에서의 만인평등사상(萬人平等思想)을 낳게 한 것이 모두 위에서 말한 가톨릭의 사회질서에 위배되기 때문이오 창조주로부터 받은 존엄한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다.
인권사상의 구체적 인식은 상대적인 것이다 인간이 역사적인 존재인 이상 그 사회도 또한 역사를 낳기 마련이다.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기본권도 그 역사 안에서 구체화한다. 에컨대 오늘에 와서 노예제도는 확실히 인권의 박탈이다. 그러나 노예라는 것이 처음 생긴 역사 안에서는 인권의 박탈이라기보다 오히려 인권(?)을 존중한다는 의식에서 노예제도가 생겼다.
옛날의 씨족 부족 싸움에서 타족(他族)을 부뜰면 죽이기 마련인데 사람을 함부로 죽인다는 것이 너무나 참혹하다는 자비심에서 생명을 살려주기로 하고 그대신 인권을 몰수한다는 생명존중사상에서 노예제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후 봉건사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사상을 볼 수 있다. 불안한 사회에서 자기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는 영주(領主)에게 자신의 자유를 그 대가(對價)로 상납(上納)했던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인식된 인권사상은 오늘의 그것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다. 다른 한편 인권은 상호준중의 의무에서 수호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인권의식은 17세기 말에서 시작된 자유주의 사상에 의하여 고취되었고 곳곳에서 피를 흘려 전취(戰取)한 것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우리들은 인권의 주장만에 사로잡혀 상호존중의 의무를 등한히 하기 쉽다. 인권이 쟁취(爭取)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될 뿐 아니라 자선의 대상도 정의의 문제도 아니오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의무에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인권사상은 권리의식에서가 아니라 의무의식에서 발전되어야 한다.
첫째는 천주께 대한 의무요 둘째는 인간에 대한 의무이다. 남의 인권을 존중한다는 사상은 그 기반이 천주께 대한 존경과 순명에 있는 것이므로 곧 신앙 안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근본사상이 없는 한 쟁취와 선언과 조약만으로는 인권이 옹호될 수 없다.
우리는 인권을 유린하는 자를 폭군(暴君)이라 부르고 그 사회를 흔히 봉건사회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 둘레에는 아직도 인권존중의 사상적 기초가 없는 인간과 사회가 얼마든지 있다. 유물(唯物)사회가 가진 인권의식은 인간의 생명과 육체의 관능적 욕구의 최소한의 보장을 의미하고 있으며 또한 그 보장 자체도 어떠한 의무감에서가 아니고 앞으로 무한히 변할 수 있는 정치적 목적에서 베푸는 자선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오늘의 실존사상(實存思想)은 인간을 신(天主)으로부터 격리함으로써 인권을 해방했다고 생각한다. 이와같은 인권의식과 인권 본해의 뜻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입으로 천부(天賦) 인권을 부르짖으면서 천주를 모르는 인간이 얼마든지 있다. 인권사상의 계몽이 절실히 필요하다. 오늘의 올바른 인권 의식은 지난날의 가톨릭운동의 역사적 소산이오 오늘의 가톨릭운동이 또한 내일의 인권의식을 낳을 전제가 된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