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혁명정부에 의해 일시중단 됐던 노동단체의 새 조직과 새 출발을 허용하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이 노동운동 내지 그 단체활동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얼마나 적극적인 관심 및 활동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적어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교회는 모든 가톨릭신자의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바탕으로한 종합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조합을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전거(典據)를 들면 『이 사태(事態)에 과감한 정신과 단결력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비참은 실로 널리 퍼져가고 있고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成長)에 의한 숙명적 장애는 가공(可恐)할 발전을 하고 있다』(레오 13세 그라베스·데꾸무니) 「레룸·노바룸」 가운데서 보는바 성직자들이 복음을 전할 의무가 상류사회에만 있지 않음을 여러 군데서 지적했고, 노동사회의 비참을 목도하고 그들의 적극적인 구제책을 그리스도의 생애(生涯)로서 장만된 복음적 교의(敎義)로서 명백히 하였다. 복음의 법령을 완수하는 길은 남을 위해서는 희생을 제공하고 자애(自愛)와 이기(利己)를 극복하는 원리(原理)밖에 없다. 이것이 곧 <레오> 13세의 말씀한 노동사태에 임하는 우리의 근본사상인 것이다.
또한 이 근본사상은 현대에 있어서의 모든 사회문제 및 우리 목전에 구체적으로 가로놓인 사태에 임하는 원리(原理)와 방향인 것이니, 이로서만 오직 공정(公正)한 판단을 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권리를 옹호하기에 단결하고 직접 노동조합을 조직한다는 것은 마땅한 권리이며, 이를 방해하는 어떤 이유로 정당화될 수 없다. 앞에 말한 전거(典據)상으로 본다면 노동조합을 이룩할 의무가 있고 또 직접 명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레룸·노바룸」의 정신을 받들어 보다 훌륭한 노동조합을 구성하기에 모든 환경을 성숙(成熟)시켜야 한다. 가톨릭 사회교의에서 정의(定義)하는 바와 조합성원(成員)의 책무 등을 가르쳐 훈련하고 그 각종 활동에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곧 교회가 원하는 바요, 또 고무(鼓舞)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면 이같은 교회정신에 입각한 노동조합은 어떠해야 하는가?
노동운동의 형식을 차용(借用)한 어떤 계급투쟁, 그로 인한 사회안전을 위협하는 암투(暗鬪)를 십분 경계해야 한다. 노자(勞資)의 단체협약(團體協約)같은 것도 원만히 수립하는 방도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단체교섭의 방도 역시 평화적인 길을 택해야 한다. 조합운동은 노자(勞資)간의 불신(不信)을 조장하는 운동이 아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혹은 조합주의와 철저히 구별되어야 하겠다. 그들의 노리는 바는 오직 그런 불신(不信)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본다. 그리스도교 노동조합의 이상(理想)은 그들의 영성적 모든 복리가 보장되는 가운데 합리적인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는데 있으며 그 방법으로는 인내성 있는 교섭과 협상을 위주(爲主)로 삼아야 한다.
그 때문에 이런 목표에 도달하기에는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무엇인가? 그 정당한 정의(定義)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어야 하겠다. 첫째 이 사랑과 자선(慈善)을 혼동해서는 안되겠다. 이를 혼동할 때 극히 「센티멘탈」한 의미로서의 사랑만을 인식하게 되는 것인줄 안다. 이는 중대한 오인(誤認)이다. 조그만한 선입견(先入見)도 없이 정의(正義)와 공정(公正)을 토대로 노동자의 정당한 권익(權益)을 보장하는 진정(眞正)한 노동조합의 출현을 누가 바라지 않겠는가. 그게 바로 그리스도교적 노동조합인 것이다.
노동조합이 흔히 그 본인의 자세(姿勢)를 잃는 것은 외부로부터 충동을 받아 본의 아닌 타력(他力)에 의해 부질 없는 행동을 취하는 일이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교 노동조합의 취할 바가 아니다. 한말로 그리스도교적 노동조합이라 했지만 참으로 그 본령(本領)에 도달하기에는 일조일석에 이루워질 수는 없다.
가톨릭 노동조합과 비(非) 종교적 일반노조(勞組)와의 협동문제도 중요하다. 공동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 그런 협동은 유리하다. 따라서 허용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이익이 정당한 것이어야 한다. 요컨데 교회는 참된 가톨릭 사상과 행동에 입각하는 노동조합의 출현을 바라고 있어 그 수와 규모가 든든히 발전할 그 뒷받침이 되기를 자원하고 있음을 명백히 해두는 바이다.
우리의 실정은 건전한 노동운동의 실현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으면서도 거기 넉넉한 객관적 준비를 구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원인을 여러모로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그 근본을 그릇치고 있는듯 하다. 혹은 그 근본을 마련치도 못하고 있는 듯하다. 법률이 보장하는 혹은 그 기능(機能=關係法律) 정도에서 노동운동은 이어저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가령 새 사회회칙 <요안> 23세 성하의 「마뗄·엩 마지스뜨라」에 보면 임금(賃金)을 정할 때 시장법칙(市場法則)만을 고집해서는 안되고 항상 정의(正義)에 비추어 참으로 그 생계(生計)를 생각해줘야 한다고 했다. 또 노동자를 상품(商品)이나 한갖 기계로 여겨 사용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충족된 우리의 가톨릭 노동사상을 어떤 방법으로 우리 사회에다가 구현(具現)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지금 곧 가톨릭 노동조합을 크게 조직한다는 것도 용이한 일은 아닐게다. 당장 이런 제의(提議)를 할 수 있다. 그것은 교회가 명하시는 것이 과연 무엇이며 또 어떻게 그 방면의 활동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공부하는 일이다.
이를 위한 연구기관 즉 가톨릭노동문제연구소가 있어 우선 이론적인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