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정부방침인 학원(學園)의 정비(整備)가 크게 논의되고 있다. 그 정비의 규모(規模)가 어느 정도의 것인지 앞으로의 진척을 보기 전에 예단(豫斷)할 수 없으나 혁명과업의 일단으로 하느니 만큼 단호히 결행(決行)될 것으로 보인다. 그 참뜻은 학원의 교육적 충실을 기(期)하자는데 있는 것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교육환경을 훌륭히 조성(造成)하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회에 교육환경에 관한 가톨릭적 교육이상(理想)을 고찰해 볼만 하다. 「인간은 환경의 아들」이란 속담과 같이 환경의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다. 하물며 청소년 피교육자에 있어서랴. 그들은 환경의 지배만을 받고 있다 해서 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 연고는 인간성(人間性)이 약한 탓이다. 인간성이 약한 그만큼 환경의 지배를 피할 수 없는 법이다.
우리의 위대한 학교이라 할 수 있는 교회를 두고 관찰해 보자. 교회는 그 안에서 무수한 성총과 무한한 영성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장소인 것이다. 천주께서는 인간성의 약함을 알으시고 그 약함을 보충할 수 있는 장소인 교회를 마련해 주셨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교회는 가장 완전한 교육적 환경이라고 하겠다. 그 뿐 아니다. 교회는 먼저 가정과 직결(直結)되어 있고 동시에 사회(社會)와 화합(和合)되어 인류생활과 진정(眞正)한 조화(調和)를 이룩하고 있는 자이다.
교회는 가정과 직결되고 사회와 화합된 일대 조화체(調和體)이며 따라서 전 인류의 위대한 교육환경이라고 했다. 그 증거(證據)로서 성총을 얻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성사(聖事=秘_)와 심오(深奧)한 교훈을 주는 예식이 거기서 집행되고 있는 것이다. 전례(典禮)와 미술, 음악 등 참으로 우수한 교육적 재료와 그 가치를 풍성히 간직하고 있는 교육적 환경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전인류의 지대(至大)한 교육환경 그 자체인 교회는 일반학교 교육에 대해서도 가장 큰 관심을 가질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특히 청소년 교육에 관한 근세 교황들의 언급을 얼마든지 인정(認定)할 수 있다. 교회의 모성적(母性的)인 배려(配慮)는 참으로 훌륭한 청소년들의 교육환경이 되어 줄 수 있는 이상적인 학교를 마치 참된 그리스도교적 가정이 건설될 거와 같이 원망(願望)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훌륭한 교회학교를 경영할 자기 사명을 중대히 여기고 있다.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더라도 본시 학교라나 교회, 가정을 보조(補助) 또는 보충(補充)하는 장소이었었다. 그러니까 교육의 장소는 가정이요 교회인 것이다. 그러나 민족사회의 발전과 번영을 가져오기에는 젊은세대는 적극적으로 학문, 기술, 예술을 습득해야 하겠으므로 이를 효과적으로 전수(傳授)시켜 줄 수 있는 학교의 임무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학교로서 가정, 교회의 그것을 대치(代置)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긴밀한 일치가 강조되어야 할 뿐이다.
어느 교육자의 이론을 빌리더라도 학교는 가정 및 종교의 교육과 손잡지 않고서는 인간은 의지(依持)할 곳을 잃을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그 본말(本末)이 뚜렷해야 하며 명분(明分)이 서야만 하겠다.
이에 상반(相反)되는 학교 교육을 경계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편 반공(反共) 교육을 표방하면서 그 내용인즉 공산주의의 기초가 되는 유물사상을 적극적으로 주입(注入)시키고 있음을 본다. 서양사(西洋史)의 어느 반교회사상을 한 대목으로 그곳만을 절단(切斷)해서 이를 크게 확대해서 설명을 하고는 비판의 여지를 주지 않고 있다. 이것은 큰 문제이다. 이것은 교사의 소양문제이기도 하다. 교사는 그것이 적어도 사상(思想)의 범주인 것을 인정(認定)할 때는 상당한 비판의 여지를 남기고 자기중심(自己中心)의 아류(亞流)를 주입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크게 삼가할 일이다. 과학교육에 있어서도 순수한 학리를 떠난 변증법적(辨證法的)인 논리를 전개(展開)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이런 것을 경계한 나머지 교회는 교법(敎法)으로 교유 자녀들이 가톨릭학교에 취학할 것을 명하고 주교의 허가 없이는 세속학교의 취학을 금해왔던 것이다. 이같은 교법은 한국의 전교지방으로서의 특수 사정을 관대히 고려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 한국교회의 교회경영학교에 관해서 착실히 논의해 볼 적절한 시기를 맞이했다. 명실공히 가톨릭교육을 실시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가톨릭학교에서는 특별한 전례행사가 있고 신자학생들을 위한 교리공부를 실시하고 하는 것만으로 그 본령(本領)에 들어 선 줄 생각지 말 것이다. 이 점 분명히 지적하겠다. <비오> 11세의 청소년의 그리스도교 교육에 관한 회칙(回勅) 「디비니 일르스·마지스뜨라」에 보면 『학교에서 종교 과목을 가르친다는 사실만으로서 교회와 그리스도교 가정의 권리와 일치하거나 가톨릭 학생들에게 적당한 장소가 되는 것은 아니며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가르침과 전 기구(機構)가 또한 각 과목과 교과서가 교회의 지도와 모성적인 감시하에서 그리스도교적 정신으로서 규정됨이 필요하니 그래야마나 종교는 실로 청소년의 전교육의 기초와 화관(花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교황 <레오> 13세의 말씀을 빌린다면 「일정한 시기에 젊은이들에게 종교교육을 베풀 뿐더러 기타 모든 괌고을 그리스도교적 신심에서 보급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성스런 분위기가 새옫나 선생의 정신을 침투하고 육성시키지 않는다면 어느 학문에서도 좋은 결과가 거의 기대될 수 ㅇ벗고 왕왕 적지 않은 해가 조차올 것이다」 (以上 가톨릭 中央協議會_55頁)고 했다. .
여기서 분명히 읽을 수 있음과 같이 도외시간을 빌려서 종교강의를 하고 기타 종교행사를 한다해서 가톨릭학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비오> 11세의 완전한 표현 그대로 전기구(全機構)가 곧 가톨릭적이어야 하겠다. 전기구가 가톨릭적이기 위해서 어떠해야겠는가? 그것은 용이한 일은 아니다. 하루에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때문에 본란은 누차 가톨릭교육의 연구기관나 및 교사들의 연구행사를 거듭 강조해왔었다.
가톨릭 학부형들은 어째서 자년들을 가톨릭학교에 반드시 취학시키지 않고 기를 써서 딴 학교에 보내고 있는가? 소위 일류학교에만 보내고자 하는가? 그 대답은 자명하다. 한국처럼 학교차가 심하고 또한 그같은 인습에 젖은 곳에서는 딴 방도가 없을 것 같다. 가톨릭학교가 서둘러서 일류학교가 되는 길밖에 없다. 그래야 마땅한 일이다.
정부가 학원(學園) 정비와 교육내용에 정당한 간섭을 함은 당연한 권리행사인 것으로 크게 성원을 아끼지 않는 바다.
우리가 안으로 더욱 충실하며 이상적인 가톨릭학교의 모습을 갖추어 가면서 민족사회의 발전과 번영에 이바지 해 간다면 이를 통해서도 성교회를 광양(光陽)할 수 있는 일이다. 가톨릭 학교는 모름지기 그 전기구(全機構)의 가톨릭화(化)와 우수한 교육방법을 실천하기에 솔선할 것이요 재정(財政)을 던져서 일류교를 건설하기에 대영단(英斷)을 내려야 할 시기에 도달했음을 솔직히 지적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