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아제한 문제에 관하여는 이미 본지의 사설과 논설란을 통하여 수차에 걸쳐 비판하였으나 바야흐로 이 나라 재건을 위한 혁명정부가 서고 구폐와 구악을 일소해 나가는 마당에 있어서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가 발표한 산아제한 또는 가족계획운동이 많은 물의(物議)를 일으키게 되었으므로 다시 그 맹점과 모순점을 지적하여 후대(後代)의 번영과 파멸의 가름길에 선 모든 백성과 지도자들이 바른 지표(指標)를 찾아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의로운 질서와 일류평화를 다음 세대에 상속시키려는 것이다.
산아제한 문제가 시작된 역사는 그다지 길지 아니하나 오늘날까지 상당한 물의(物議)를 일으켜 왔고 특히 전쟁 후에는 의례히 전패국(戰敗國)의 제1차적인 국민운동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서기 1798년 <말더스>는 『인구원칙(人口原則)에 관한 시론(試論)』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인구 증가율과 식량증가율의 대조(對照)에서 오는 비관적인 우려(憂慮)를 결론으로 맺었으나 논자 스스로가 인정한대로 하나의 불완전한 가정(假定)에서 출발한 불안스러운 시론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처음 익명(匿名)으로 출판하였던 것이 이외에도 당시 사회의 반향이 컸으므로 그 후 1803년 재판을 내면서 자기 이름을 밝혔던 것이다. <말더스>가 인구조절방법(人口調節方法)으로 든 것은 만혼(晩婚), 정조(貞操), 독신생활 및 별거(別居)의 장려에 그쳤으나 그 후 『신(新) 말더스 논지』들은 타태(墮胎)에 의한 인구조절을 인정하였고 그 후부터 산아제한운동이 마치 하나의 문화운동이나 되는 듯이 착각하는 자들이 나오게 되었고 오늘에 와서는 가족계획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자연법칙을 정복한 것 같은 영웅심리의 조종을 받으며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소비하는 존재인 동시에 또한 생산하는 존재이다. 만약에 인간이 적게 생산하고 많이 소비하기로 마련된 존재라면 산아제한운동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조만간 아사(餓死)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만약 인간이 많이 생산하고 적게 소비하는 존재라면 또한 산아제한이 문제되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생산저축이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본생활에 소요되는 소비성에는 한도가 있는데 반하여 생산성에 있어서는 한정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있다. 이 개량할 수 없는 인간의 생산성이 경제학자 특히 통계학자들에게 일종의 불안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라나 역사적으로 볼 때에 어느 국가가 융성하고 국세가 확장된 시대는 그 나라 산아율(産兒率)이 타국에 비하여 높았던 때이다.
「로오마」, 「희랍」의 전성시대나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동안의 「불란서」만 봐도 알 수 있다. 혹자는 세계 인구가 30억을 넘어선 오늘에 와서 옛날의 예(例)를 들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옛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선대(先代) 사람들은 바다 밑을 몰랐고 하늘에 날라보지도 못했던 것이 아닌가? 아직도 이 지구상에는 이미 알고있는 생산수단으로서 개척할 수 있는 미개발지대가 많이 남아있지 않는가? 또한 원자력, 우주탐험 등으로 새로운 생산수단과 새로운 개척가능지가 계속 발견되어가고 있지 않는가?
물론 바른 신앙을 가진 자에게는 이러한 문제를 운위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천주께서 인간을 만드셨고 인간이 공중에 나는 새나 들에 피는 백합화 보다 더 귀하다 하셨지 않는가? 꽃과 새가 번식제한을 하지 아니하여도 사는데 인간이 천주의 섭리(攝理)를 불신한다면 또 한 번 원죄를 더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가족계획을 주장하는 국민운동 지도자들은 가장(家長)으로서 각자의 가족계획에 충실하다면 왜 인공적이고 반윤리적인 산아제한은 하면서도 가족이 필요이상 발육하는 것을 방치하여 의식(衣食)을 낭비(浪費)하게 하는가 반문하고 싶다.
현하(現下)의 인구문제는 확실히 하나의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 해결책을 가족 안에서 더구나 인간생리의 개조에서 구하는 것과 같은 소극적 태도는 우매(愚昧)의 극을 다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마치 집에 밥이 한 그릇밖에 없으니 하루에 한 술씩만 먹고 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위(胃)를 끊어내어 적게 만들자는 것이나 하루에 한 알씩 먹고 연명을 하면 명대로 살 수 있겠다는 등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어리석은 생각과 같은 것이다. 이 때에 가장은 가족을 거느리고 일터를 찾아 먹을 것을 생각하며 배대로 먹고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는 힘을 기루어야 할 것이 아닌가? 국민운동 지도자들은 먼저 국내의 생산성 개척에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해외로 진출할 곳을 마련하기 위하여 만반의 노력을 하고 있는가? 이 겨레가 영원히 한반도(韓半島)의 남쪽에서만 움츠리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앞날의 국운의 융성을 위하여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앞으로 다가오는 윤리적 가정붕괴와 사회부패를 생각해 보았는가?
새 세대의 어진 어버이가 되어야 할 우리들이 새 생명의 증가를 겁내는 이유가 과연 어디 있는가? 입으로 자비(慈悲)를 부르짖으며 가슴 속에 향락적 독선(獨善)이 차 있는 것이 아니라면 새 생명 속에 숨어 있는 위대한 생산성을 살펴보려고도 하지 아니하는 봉사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지난날의 성현(聖賢)과 위인(偉人)들이 대체로 많은 형제자매를 가지고 있었는 반면에 범죄자(犯罪者) 중에는 독신자가 많았다는 통계를 가지고 있다. 그 뿐 아니라 행복한 가정에는 자녀가 많고 자녀 없는 가정이 불행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산아제한의 한 방법으로 완전한 생식능력을 제거하였다면 남녀를 막론하고 그 심리적 불안과 불만이 어떠하겠는가?
끝으로 이 나라 백성의 여론은 많은 자녀를 거느리고자 하고 있고 그것이 행복한 가정이라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할 용기가 거기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또한 인부에서 선동하고 있는 인공적인 피임법을 찬성하지 않는 자가 다수일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