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은 우리의 거룩한 선인(先人) 순교선열들을 기억하는 한국 가톨릭의 순교신심(信心)의 달이다.
한국 근세사(近世史)에 찬연히 빛나는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의 참수(斬首) 치명의 날이 1846년 9월16일인 것을 비롯하여 그를 도와 만 가지 고초를 같이 받았으며 그 당시 평신도의 제1인자이던 「기해일기-己亥日記=殉敎小傳」의 저자인 복자 <가를로> 현석문의 참수치명 역시 같은해 같은달 19일이었다.
이렇게 9월 같은 달 안에 참수형, 교수형, 혹은 혹독한 형벌 끝에 옥사한 많은 복자와 또한 무수한 치명순교자의 높으신 영광을 현양(顯揚)하기에 계절적인 의욕마저 불러 일으키는 이 달을 택한 것은 그 너무나 당연함이 있는 것이다.
한국 가톨리그이 기원을 말할 때 거의 공식처럼 꺼내는 것은 이 순교의 역사적 사실이며 그것은 어느 순교사에 비겨 추호의 손색마저 없음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그토록 역사적 여건(與件)이 분명하고 순교사의 내용으로서의 심도(深度)를 구비하고 있음을 어디서 또 찾을 수 있으랴 싶다. <아드리앵.로네>저 한국 79위 순교복자전을 보면 <드 게브리앙> 주교가 교황성하 어전에서 행한 연설을 인용하고 있다(1925년 5월9일).
『조선천주교회는 현대 전교지방 역사 가운데서 아마 유일한 실례(實例)였을 것이니 그것은 18세기 말엽에 직접 전교를 받은 일이 없이 다만 천주의 성총(聖寵)이 종교의 진리를 탐구하는 영혼을 비침으로, 말하자면 자발적으로 탄생한 것이다. 마치 동방의 세 박사들이 그들을 「베들레헴」에로 인도하여 줄 별을 안타까이 기다리던 것처럼 조선의 학자들은 그 봉건국가의 고립된 가운데에서도 우주(宇宙)의 해석(解釋)을 발견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모든 서적을 열심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그들도 천주의 섭리(攝理)로 그들 손에 들어왔던 책 가운데서 신비로운 광명이 빛남을 발견하였으니 그 책은 종주국(宗主國)인 중국천자께 보냈던 조선왕의 사신(冬至使)들이 북경서 가지고 온 천주교 서적이었다』 동저의 저자 자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으로 특이한 사실(史實)이어서 천주의 지혜의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의 지혜가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훌륭한 본을 보여준 것이니, 그것은 안남(安南)이나 일본이나 중국의 교회와 같이 선교사의 열성으로 창설된 것은 아닌 때문이다.
우리 순교사에 자랑할게 이뿐이겠는가? 복자 <베드루> 유대철(劉大喆)은 불과 열세살 난 소년으로 그때 수감된 그의 아버지와 여러 순교자들의 용감한 행장을 감명 깊이 목도하고 흠연히 관가에 자수(自首)했다. 문초 당하기를 열네번 고문 열네번 태형(笞刑) 6백도와 치도곤(治盜棍) 45도 이상으로 뼈가 부러지고 살이 다 헤여졌으면서 오히려 얼굴에 희색을 띠우며 다른 교우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후에 교수형을 받았다. 어느 사기(史記)에도 가장 훌륭한 순교자의 한 분인 것을 명기하고 있다.
1839년 9월26일에 참수된 북녀 허막달레나, 박막달레나 전아가다, 김골룸바, 김율리엣다 등은 모두 가냘푼 봉건사회의 여성들이었다. 그 중에 김 <골룸바>는 26세의 꽃다운 처녀로 끝내 동정을 지켰었다. 이들에게 이만한 신앙을 목숨을 바쳐가면서 사목해 준 외방선교사 주교 신부들을 또한 사뭇치도록 기억하게 해준다.
이다지 찬란한 역사도 실은 1945년 이전 일제(日帝)의 치호 아래서는 터놓고 선양하지 못했었다. 그런 관계도 있고 해서 해방 후부터는 경향을 막론코 순교자를 현양(顯揚)하는 일에 큰 정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몇 권의 서적도 박아졌고 세남터 순교유지(遺址)엔 기념탑도 서고 했다. 주로 학생행사의 일부로 순교사극(史劇)의 공연을 보기도 했다.
순교자 현양의 가장 완전한 방도는 그들의 고귀한 넋을 이어받아 각자의 신앙생활에 도무지 분열될 수 없는 단석탑적(單石塔的) 완전을 기해야 할 것은 재론할 것 없겠다. 그러나 현양의 문자가 표시하는바 밖으로 드러낼 수 있는길 역시 긴요한 것임을 강조하는 바이다. 누구의 말을 차용할 것 없이 문화민족이란 문화를 사랑할 줄 아는 민족인 것이다. 귀한 것을 사랑할 줄 아는 민족인 것이다. 귀이다 자랑삼을 것을 자랑할 줄 아는 민족인 것이다. 그 좋은 증거로서는 자기네 문화적 유산(遺産)을 계승하지 못하고 항상 외래사조(外來思潮)에 갈팡질팡하고 있는 민족들이 근대적 국가의 형성마저 성취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 순교자의 현양은 밖으로 얼마든지 크게 드러내어서 심할 것은 없는 것이다. 이런 취지로 한국 순교자 현양사업(顯揚事業)을 착안하고 그 조직을 결성한 줄 알고있다. 동 현양회사업의 침체(沈滯)와 부진(不振)을 지적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 까닭이 어디 있음을 아는 바도 없다. 그러나 근 2·3년간 그 뚜렷한 사업계획을 들고나선 일이 없이 침묵의 미덕을 쌓고 있는 듯하다. 동 회와 같은 전국적인 조직으로서는 항상 지방에까지 활발히 자극을 줄만한 각 방면의 노력을 꾸준히 계속하지 않고서는 적어도 앞에 말한 인상을 모면치 못할 것이다. 최근 영국 가톨릭에서는 종교개혁 박해 때의 순교자들에 관한 시복·시성 청원을 성청에 제출했다고 전한다. 그들의 현양사업은 참 부럽기만 했다. 자손만대에 남길 현양비(碑)라든지 기념관 박물관 등을 볼 때 참으로 후손된 도리를 다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이게 번영과 장래를 무한히 약속하는 축복된 사람들의 사람된 도리를 하고 있는게로구나 하는 감계무량한 느낌을 얻은 바 있다.
일본 「나가사끼」에는 순교터에 세 개의 기념 건물을 세웠는데 그 하나는 일본 26성인 기념성당이요 다른 하나는 큰 기념홀이고 다른 하나는 사제관이다. 이곳 부지는 약 15만평에 달하여 일본청부는 이 거대한 재산을 「나가사끼」 대주교에게 기증해왔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가톨릭에서는 이 지역에 순례지를 설정하게 되어 지금은 주요한 관광지(觀光地)로 외국으로부터 순례 신청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런 것들이 모두 남들이 잘하고 있는 순교자 현양사업의 한편인 것이다. 지금 정부에서는 이 관광사업이란데 상당한 관심을 보내고 있다. 반듯한 관광호텔 등도 제법 형세를 할만한 것이 없지 않다. 여기 조심할 것은 탐승객들의 비위만 맞추기에 급급하여 술(酒)과 오락으로 문란한 지대로 개방하는 일이 있다면 이보다 선조의 승지(勝地)를 더럽게 파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정부가 만일 이런 점에 눈을 뜬다면 우리 순교자의 거룩한 땅은 한 곳도 남기지 않고 거룩히 보전할 방도를 수립할 것이다.
순교자 현양사업에 정성과 수고를 바치자. 그렇게 해서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적을 가다듬어놓지 않는다면 자유해방을 맞이한 세대(世代)로서 뒷사람들의 지탄을 면할 수 없으리라. 순교성월 9월의 신심으로 순교자 현양사업에 지력과 재력을 동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