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세계 나환자의 날(2월 28일-매년 2월 최종주일)을 맞이한다. 매년 한 행사처럼 맞이하는데, 우리가 구태여는 관심을 표명하는 연유를 적어보겠다.
나병 및 나환자에 관한 문제를 오늘날 의학자에 의한 치료, 치유의 경지를 완전히 벗으나 사회문제이라고 한다. 즉 나병은 쉬히 치료할 수 있고 또 완괘될 수도 있다. 다른 전염병과 같은 무서운 감염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가는 소리가 새삼스럽지 않다. 1947년 이래 설파제(劑)의 발전으로 거의 완전한 효과를 보게 되었고 1950년에 이르러서는 의학적 입장에서는 이 병은 아무리 악화된 상태에서도 불치(不治)의 병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宣言)하게 되었다. 1953년 남태평양 「피지」제도(諸島) 「마콩가이」도에서 3십수년간을 나호나자 치료사업에 종사한 <마리 스잔느> 수녀는 나병균(미코박테리움 마리아눔)과 그 예방접종(接種)을 발견했다. 이 사실은 그 당시 본 가톨릭시보도 크게 보도한 바 있다. 그밖에 국내 저명한 세균학자 및 관계 전문가의 말을 들어보더라도 나병이 치유될 수 있음을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문에 나병은 이미 의학상의 문제이기 보다는 사회적인 문제인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가 이같은 그 사회성(社會性)을 인식하고 구제에 노력한 역사는 참으로 오래된 일이다. 그 중에서도 720년 「쌍또 가렌」 대수도원 <옷토마르> 원장은 환자들을 위한 숙박소를 설립했다. 십자군원정(遠征)의 결과 서구(西歐)에 동 병이 만연했을 때는 오직 성직자들만이 그들을 찾아 수고했으며 각처에 나병원이 세워졌음을 본다. 1142년 설립된 나자로회는 나환자들이 세운 것이며 동 회는 그 발전적으로 가령 독일의 요한기사수도회, 프랑스에서는 갈멜회 등과 합류 또는 합동하게 되었다. 성프랑치스꼬는 거리에서 나환자와 다정한 키쓰를 교환한 기록도 있다. 「라떼라노」 공의회에서는 환자들을 사목할 각종 명령을 발하였다.
그후 구라파에서는 나병은 차차 소멸하게 된 것인데, 이와는 반대로 인도를 포함하는 동남아 각국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 등지에는 계속해서 많은 환자를 내게 되었다. 남미(특히 부라질)에서도 많은 환자를 속출시켰던 것인데 그러나 이곳은 가톨릭 구라사업이 적극적인 혜택을 입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1952년 현재 순전히 구라사업에 종사하는 가톨릭 남자수도회 36, 여자수도회 57, 그리고 구라 가톨릭병원은 97에 달하고 있다. 1889년 저 유명한 구라의 사도 <다미앙> 신부가 환자들과 동거생활을 하던 중 동 병에 감염되어 삼아한 그후 145명의 성직자, 수녀들이 같은 경로로 동 병에 희생당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환자들을 벗삼아 사목에 종사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마치 나환자와 같이 대접하리라고 말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위의 실적이 증명하는 거와 같이 가톨릭은 나환자에 극진한 대접을 해온 것인가 한다.
한국의 구라사업의 실정은 어떤가? 그 실정을 들어 설명할 여지도 없을만큼, 미진한 것이라고 하면 좀 지나친 표현일까? 먼저 구라사업의 사회성(社會性)이 충분히 인식되어 있느냐 하는데서 부터 의심이 간다. 사회성 또는 사회문제에 있어서는 가장 큰 요건(要件)은 일반적 관심에 있다고 본다. 그러한 관심은 마땅히 공동의 공통이 관심사가 되어야 하고 따라서 그렇게 해결될 길을 먿어야만 하는 법이다. 이런 뜻으로 이는 또한 정치문제이기도 하겠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사회적 대책(對策)이 수립되어야 할 것인즉 필경 사회정책(社會政策)으로 발전하는 동시에 강력한 시책(施策)의 효과를 걷우어야 한다. 사회정책이란 사회적인 정치적 대응책(對應策)이라고 말할 수 있다. 뒤집어서 말하면 정부가 나서서 일정한 계획을 세우고 예산을 던저서 해결하지 아니하고서는 달리 해소될 길은 없는 것이다.
만일 정부에서 경제5개년계획안과 같은 프랜을 가지고 이 문제 해결에 임한다면 교회는 풍부한 경험으로 얻은 기술원조와 그밖에 물질적으로도 가능한 많은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지금까지만으로도 막대한 재정을 동 사업에 던져왔고 앞으로의 재정 념출에 부심(腐心)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한 애덕사업(愛德事業)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회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만한 유효한 구라사업에 공헌했다고 자인(自認)할 만한 경지에 있지 않다. 그러나 가톨릭 경영의 그 방식에 주목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비단 나환자뿐 아니라 지역사회 개발에 좋은 「모델」로 등장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국민적 관심과 정부의 철저한 시책이 긴급히 요청되며 당장으로서는 가톨릭경영의 구라 「프로젝트」 및 기존 시설에 한해서라도 절대적 성원을 보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이 문제에 한해서 어떤 감정적인 말을 나열하고 또 조그마한 자랑을 크게 들추고 할 때가 아닌줄 안다. 문제는 참으로 중대하다. 또 심각하다. 민족의 운명을 걸고 있는 시련(試鍊)에선 그것이라고 지적하는 바이다. 우리의 무관심 때문에 제마다의 영달(榮達)이나 버릴 수 없는 자기도취 때문에, 혹은 도로를 건설하고 테데비망을 펴가고자 한편으로 신체의 형상(形象)마저 무너뜨리고 있는 그들 형제들의 오늘을 어찌할 것인가? 요즘 신문사회면을 메우다 싶이 하는 농어촌 자매결연을 그들에게도 뻗칠 수 없는가? 나환자 형제와 자매결연을 맺어 나설 곳은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