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교구 설정(設定) 제50주년을 맞이한다.
대구교구는 1911년 6월11일 그당시 민대주교 관하(管下)의 한국교구가 경성교구(京城敎區)와 대구교구의 두 교구로 발전하여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한국 최초의 교구의 하나로 탄생했다.
초대 감목에는 아직도 40대구교우이던 그 모습마저 생생히 더듬을 수 있는 <후로리앙 데망쥬> 안주교께서 「로오마」 성청의 임명을 받아 동년 6월26일 대구에 부임하면서 초창기의 건설을 완성하였다.
1936년 6월11일 대구교구 설정 제25주년을 축하하는 성대한 기념 축전(祝典)을 지냈다. 지금으로부터 꼭 25년 전이다. 그때의 광경을 『1936年 6月11日에 大邱敎區設定 25周年 安主敎 管下 主敎昇品 25周年의 _大慶事를 祝賀하는 盛大한 記念行事가 全敎區的으로 大邱에서 擧行되었다.
아침 9時에 桂山洞 大聖堂에서 祝賀大禮미사를 祭獻 午後 1時에 全市街에 祝賀旗行列 午後 3時에 루르드굴__에서 各 敎區代表 各地方 敎會代表 3千餘 男女敎友官民 多數 參席下에 主敎宅에서 百_貴賓으로 祝賀宴을 _設 午後 8時에 _前公會堂에서 記念大__會가 있어 이날 하로는 全市가 祝賀로 一色化하였다』(大邱天主敎會史)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25주년 축하대회 준비위원회에서는 교구설정 및 안주교 각하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敎區沿革』을 출판했다. 거기 수록된 기록과 80여 매의 사진 등은 귀중한 사료(史料)로 빛날 줄 안다. 앞 인용문에서 본 바 누가 어떻게 모여서 몇시에 무엇을 했노라 하는 것이(그런 기록이) 큰 의미(意味)를 스스로 지닌 역사성(歷史性)이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기념사진을 남겨 두듯 알뜰한 정성으로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여기 이 50년의 회고를 늘어놓자는 것은 아니다. 또 어떤 감회를 서술해 보랴는 것도 아니다. 교회의 창설(創設)에서 중세(中世)를 거쳐 종교개혁에 이르고 다시 현대에 이르는 실로 유구한 2천년사에서 볼 때 그것은 불과 한 실오라기의 길이밖에 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50년이란 유형(有形)한 제역사를 기념하는 그 당연한 심사(心事)와 또 거기서 찾을 많은 심량(心_)을 결코 경홀히 여길 수는 없겠다. 이것을 말하고저 할 뿐이다. 지금은 저 불란서 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이 수단자락을 걷어올려 발을 빼고 자전거를 어깨에 걸머지고는 강물을 건너 공소집을 찾아가던 그 때는 아닌 것이다. 남방천주교 청년회와 해성학교가 서고 은나팔을 불며 시가행진을 하던 그 때는 아닌 것이다. 지금은 「바티깐」 방송을 통해서 교황성부의 말씀을 육성으로 들을 수 있고 또 거기까지 하루면 「잿트」기 편으로 직행할 수 있는, 한말로 말해서 「로오마」와 신작로(新作路)를 내놓고 있는 때인 것이다. 「로오마」와 같이 숨쉬고 움직일 수 있는 또 마땅히 그러해야만 하는 때인 것이다. 얼마전 경북 영주와 전북 남원에 막심한 수해가 있었다. 이 소식을 들으신 <요안> 성하께서는 곧 구호금을 하사하셨는데 불과 3주간만에 그것을 전달할 수 있었다. 몇일 전에는 성하께서 모든 국가가 협상으로 3차전을 피하도록 하라는 평화호소를 하시고 기원미사를 집전하셨는데 그 사흘후, 우리 일간신문 등은 전송(電送)사진을 게제하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지금 구라파에는 성직자 신학생들을 포함하는 40여 명의 가톨릭유학생들이 있어 「로오마」에서 모임을 가지고 성하를 알현하고 하는 일을 쉽게하고들 있는 것이다.
교구의 교육·사회사업 등은 또한 대사회적인 중요성을 더욱 폭넓혀가고 있으며 특기할 것은 언론의 주도(主導)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목사회학(司牧社會學)의 이론을 빌릴 것 없이 최선의 고도(高度)의 교회적 영향을 미치게 하는 방도인 것을 더 길게 말할 것 없으리라.
잠시 50년 후의 오늘을 살펴본 것이라 할까. 50년의 역사를 어느 기록에서 보다도 오늘의 모든 표현에서 찾아본 것이라 하겠다.
계산동 대구교구 주교좌 대성당 앞뜰에는 교구설정 25주년과 초대 안주교 각하의 재임 25주년을 같이 기념하는 기념비가 서있다. 이 역시 25주년 경축사업으로 된 것이다. 25년 전 그때 25주년 기념을 맞이했을 때 그때서부터 25년 전을 생각하고 참 격세(隔世)의 느낌을 서로 나누었던 것이다. 수많은 성직자 특히 본방인 신부, 본당 그리고 자랑스런 건물 등, 이것이 모두 25년간에 이루어졌음을 마치 기적을 보는듯 신기하게도 여겼을 것이다. 또한 25주년을 기념할 수 있게된 각자의 자축(自祝)도 가슴을 벅차게 해주었을 것이다.
이제 그 50주년을 맞이했다. 25주년에 25주년을 겹쳐 놓은 것이다. 우리 모두의 경사요 축복에 쌓인 대구교구의 성년(聖年)이라 하겠다. 이미 언급한대로 교구사업은 그 넓이에 있어 양적(量的)으로 힘에 겨울 지경으로 그 어느 축전(祝典)의 형식에서 한갖 심회를 푸느니 보다 참된 기념은 멸사(滅私)의 자기봉헌(自己奉獻)을 제둘레(_域)에서 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이해를 기념할 사업에 관해서 비공식의 상당한 논의도 있는 것으로 듣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