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典禮)의 이해(理解), 그 지식의 보금 등이 일반 평신자 간에 계몽되어야 한다는 여론은 이미 수년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이의 실행방도는 활발한 전례운동(典禮運動)을 일으키는 일인데, 그같은 운동을 시작할만한 결정적인 동기(動機)를 아직도 장만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에 앞서(先行하여)야 할 것은 아직도 전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고, 행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할 줄 모르고 있다. 따라서 가장 귀중한 효험(效驗)을 망실하고 있다 하는 일반적 자각(自覺)이 있어야 할 줄 안다.
성청에서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그리고 행동적으로 미사에 참례할 것을 권면한 문헌(文獻)은 근년의 것만으로도 수종을 넘는다. 비오 12세께서는 생전에 많은 교황회칙을 반포했지만, 그 마지막 것은 성하의 전례에 관한 훈유(訓諭)였다. 이 성청의 소리에 호응하는 각지의 전례운동은 더욱 활발히 되었고 그 경향은 복고(復古)의 기운(氣運)을 자아내게 하는 강한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전례운동을 두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공식예전(禮典)이요 다른 하나는 단순한 신심(信心)이다. 전기 교서들은 그 명확한 구별을 촉구하고 있다. 예전(여기서 말하는 전례와 예전은 동일한 뜻이다)은 그리스도 친히 세우신 것과 교회가 설정한 의식(儀式)으로 예전서(禮典書)에 기록된 것을 말한다. 단순한 신심을 위한 행사란 비록 성당 안에서 공식으로 거행되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전자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주로 이 교회의 공식의식에 속하는 전례에 임(臨)하는 우리의 많은 결여(缺如) 또는 결정적인 결점(缺點)을 솔직히 지적하고 그 시정의 방도를 얻어야겠다. 이것이 곧 우리가 할 전례운동의 적어도 소극적인 동기라도 되었으면 한다. 그 몇가지를 적기하면, 미사전례와 직접관계가 없는 성가(聖歌)를 부르게 허용되지 말아야 한다. 미사 중에 전혀 다른 신공을 바치거나 묵주신공을 드리는 등 하는 것은 그 미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다는 교회의 가르침과 느게 어긋난다.
이렇게 말은 쉬울지 모르나 실상 우리의 실정으로 일반신자들이 다 성가를 부르기도 요원하고 또 훈련된 성가대를 양성하기도 용이한 일은 아니다. 또한 지적할만한 것은 『엔 꿈 스삐리 뚜 뚜오』 『글로리아 도미네』 같은 간단한 용답도 할 줄 모르고 있고 그 뜻도 알지 못하고 있다. 그 창하는 곡조를 가르치는 동시에 뜻을 설명해 주는 것이 긴요하다. 「올간」 사용의 문제도 중요하다. 전례에 따른 성당 안에서의 「올간」 반주자가 각 본당에 반드시 있도록 양성되어야겠다. 미사와 일치하는 성가미사가 전국에서도 몇본당을 제외하고서는 매우 어려운 형편인 반면에 합송미사는 크게 성공적인 것으로 본다. 신자들이 미사의 각 부분에 일치하는 기구를 합송하고 또 성가를 무르고 하므로, 사제와 일치할 수 있는 회중(會衆)이 되는 성과를 올릴 수 있다. 이보다 더 진보적인 방법으로서는 「다이알로그」 미사 즉 대화(對話) 미사가 있다. 여기에는 세방식이 있는데 그 제일 간단한 것은 신자들이, 가령 『아멘』 『엘 꿈 스삐리 뚜 뚜오』 『데오 그라시아스』 『글로리아 띠비 도미네』와 같은 간단하고 즉시 배울 수 있는 응을 익혀 소리를 합쳐 답한다. 이 정도의 라띤말은 누구나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그 미사의 서간경, 성경은 분명한 발음으로 적당한 음성으로 한사람이 읽게하며 봉헌시와 영성체중에는 아름다운 우리말 성가를 부른다. 또 간단히 요긴한 대목에 가서는 「미사해설자」가 있어 해당경문을 읽어준다. 이것을 대화 미사라고 하는 것이다. 그 어느 방식이건 하나를 택하여 꾸준히 반복함이 좋을 것이다. 다만 경계할 것은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불분문명한 방식만은 지양되어야겠다는 것이다.
전기 성청문헌에도 나타나있음과 같이 가장 알맞는 말하자면, 그 지방 실정에 적합한 방식을 규제(規制)할 것이며 필요한 때는 성청의 인가(認可)를 얻어 정연히 시행되어야 할 일인줄 안다. 그러나 여기서 어느 방식의 제의(提議)를 하거나 또 아무마련도 없이 비판을 가하자는 것은 아니다.
앞에 말한대로 전례에 대한 일반계몽이 급선무인 것을 강조한다. 그렇게 계몽되었을 때 필경 일반이 자각이 일어날 것이며 전례운동의 역사적 발전과정에도 큰 관심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이런 기반 위에 전례운동은 전개(展開)될 수 있겠다. 교회가 권하는대로 신자들이 전례의 본질을 선양할 수 있도록 전례교육계획이 수립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