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순수하게 내가 쓰고싶어서 쓰는 것이다. - 이 말은 다시 말한다면 쓰지 않고는 그냥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실상 최근에 내가 오래만에 밤을 새워 읽은 책은 이 책이다. 읽어도 그냥 읽지를 못하였다. 혹은 크게 웃고. 혹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었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도 그와 같이 되리라고 예상하면서 쓴다. 또 내가 순수하게라는 말은 내가 이 책에서 받은 감명(感銘) 그대로를 솔직하게 정직하게 쓰고자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같은 인간이, 학식도 체험도 수양도 인격도 마침내 성총도 부족한 인간이 주제넓게 이 위대한 작품에 대하여 비판할 능력도 그러할 자신도 없다. 그러나 남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대답이라도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고개라도 끄덕여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시치미를 떼고 들은둥마는둥하는게 예의상으로도 될 수가 있겠느냐? 더구나 다 같은 동양인의 한 사람으로서 아니다 한 신비체의 지체로서, 같은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비록 말제(末弟)의 말제 아우, 겨우 입을 떼는 두살 아기라 할지라도.
어쩌면 이렇게도 우리가 하고싶은 말은 이 책이 다해버렸는고. 어쩌면 이렇게도 우리가 하지 못하는 말을 저자(著者)가 다해버렸는고. 읽어 갈수록 자꾸 가슴이 시원해진다. 미소가 절로 흐른다. 너울거리며 춤을 추고 싶어라.
『만일 동양이 그리스도 안에 서양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동양은 서양을 만나 그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서양이 그리스도 안에 동양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서양은 동양을 만나 그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동양이 서양화된다면 그것은 동양보다 더 나쁘게 될 것이다. 동양과 서양이 그리스도 밖에서 결혼을 한다면 그 결합은 일시적인 광증(狂症)의 결합이기 때문에 영속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다만 기형아(畸形兒)를 낳는데 불과할 것이다.… 동양을 회두(回頭)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동양문화와 그 인생관에 세례(洗禮)를 주어야 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譯者 緣起 P23)
『그러니까 우리의 순례(巡禮)의 방향은 서향(西向)도 아니오 동향(東向)도 아니오 내향(內向)이다. 이것이 내가 동서의 <彼岸>에로의 움직임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서방적이라고 일컫기는 공평치 않다. 그리스도교는 보편적인 것이다. 사실로 서방은 동방에서 배울 것이 있다…』 (P360)
그렇다 신에게 동방이니 서방이니가 어디 있겠느냐? 무릇 종교는 세계적이라야 한다. 일본의 신도(神道)를 벨기 사람이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서학(西學)을 반대한 것이 동학(東學)이라면 잘못은 이중적인 것이다. 첫째 서학이라 규정지운 것이 잘못이오 둘째 동학이 세계쩍인 종교로서 성립되리라고 믿었던 것이 잘못이다. 동방이니, 서방이니 하는 것은 인간의 장난이 아닐가. 『우리가 만유인력법칙(萬有引力法則)을 숭상하지 않아도 능금은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P. 324) 능금이 법칙에 맞추어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금이 떨어지는 대로 사람이 그러한 법칙을 깨달은 것이다. 법칙은 발견하는 것이오 발명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발견하기 전에 아메리카대륙이 없었더란 말인가? 사람들은 이와같이 본말(本末)을 전도(顚倒)하기가 일수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자기가 만든 법칙에 따라 만물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신은 죽었다』고 떠들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떠드는 사람은 주로 서방인이다.
그런데 이 자서전의 저자 죤 오경웅 박사(吳經熊 博士)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다. <라인바커> 교수는 그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즉 『우 박사는 현세계의 가장 비범한 인격자의 한 사람이다. 그는 동서에 걸치는 모든 지식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그는 정신이 약동하는 우아한 영문을 쓰고 현대 정치문제와 영미법(英美法)의 난해한 문제로부터 고대 중국의 쾌락주의(快樂主義)와 「리지어」의 <데레사> 성녀의 자서전 가운데의 철학적 함축성(含蓄性)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지 토론하는 능력이 있다…』(P332)
그렇다 그는 유교와 도교(道敎) 속에서 자라났고 불교도 깊이 연구하였다. 게다가 그는 영파시(寧波市) 은행가의 차남으로서 어릴때부터 영어를 배웠고 아메리카의 대학에서 우등생으로 파리에 파견 장학생이 되었고 구라파 각국에서 연찬(硏鑽)을 거듭하였다. 법철학 국제법학이 전공이지마는 법학계에서 언론계에서 입법원에서 정치인으로서 또한 시인으로서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이었다. 그런데 그는 아무리 하여도 해결할 수 없는 슬픔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세속적 영광을 한몫 차지하고 있으나 그런것은 지극히 공허(空虛)함을 알았다. 소멸할 것에 만족한다는 것은 욕심도 아무것도 아니다. 전세계가 나에게 욕심이 날만한 아무것도 다시는 아니준다. 오직 한가지 내 욕심은 천주의 말 잘듣는 어린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렇게 결심만 하면 누구에게나 다 공개된 것이다. 만일 이러한 욕망이 일체(一切) 가운데서 가장 고귀한 것이 아니라면 내 마음이 그 안에 안정될 수 없을 것이며 또 그것이 일체의 인간에게 공개된 것이 아니라면 내 생각이 단 한순간이라도 그 욕심을 지닐 수 없을 것이다. 천주의 나져가 되는 무상(無上)의 특권이 만인에게 공개되었으니 그보다 못한 어떠한 다른 여러가지 특권을 누린들 무슨 조용이 있으랴?』 (P, 14)
그런데 그는 『신앙인의 자유를 잃고 자유인의 신앙을 찾고 있었다』 (P 78)
그렇다 그는 이제 깨달았다. 세상에는 얼마나 이러한 사람이 많은고 그러나 이렇게 깨닫고 스스로 자백하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고! 나아가서 다시 이것을 자각하면서도 스스로 가면을 쓰고 무슨 구실이든지 날조(捏造)하여 호언장담하는 사람이 많은고! 그는 어린이가 되고 싶다 하였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서 온순하였다. 정직하였다. 남에게 친절하였다. 영리하고 예민하였으나 과언(寡言)이었다. 매사에 신중하였다.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였다. 의(義)를 위하여 싸우기에 용감하였고 자기의 직무에 충실하였다. 일찌기 그는 성서에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른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그것은 영파(寧波) 사람들이 아버지를 「아파」라고 하였는고로 그것이 유사한 발음이기 때문이었다. (P. 19) (오늘날 우리 말은 유사가 아니라 바로 동일하지 않느냐!)
그런데 이 책 제2부 제12절에는 동방의 3대종교를 요령있게 소개 겸 해설 하였다. 이러한 3대종교는 결국 그리스도교의 준비역한을 할만한 것이오 과거에 하였으며 앞으로도 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실로 대담무쌍(大膽無雙)하다. 이것들의 신비적 요소가 그리스도의 신비체와 올한다는 것이다. 아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내포(內包)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우리 순교자들이 그래서 주의 복음을 그렇게 중국에서 빨리 배워왔구나 한다. 기러한 부면을 읽을 때에 나는 마음이 시원하기가 짝이 없었다. (이 책 가운데 나타나는 저자의 시작(詩作)을 비롯하여 많은 동서의 시작, 주옥같은 시작들이 우리의 정서와 감격을 높이 앙양시키는 것은 확실히 우리로 하여금 저자의 인격에 접하게 할 뿐 아니라 그 순간마다 우리의 영혼을 성화(聖化)한다. (특히 우리의 순교조상들이 이 시들을 원문 그대로 읽으셨더라면 얼마나 더한 원기와 힘을 내었겠을가!)
중간에 수필 몇편이 나온다. 이 수필과 시와 더불어 이 책은 문학작품으로도 훌륭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그가 스스로 말한 바와같이 그의 일생이 결코 우연이 아니오 아버지요 어머니신 주의 섭리(攝理)인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가운데 그가 부부애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체험을 술회한 것을 잊을 수 없다. 그의 부인은 무학(無學)이다. 그와 그의 부인과는 동갑이다. 그들이 여섯살 때에 그들의 부모가 약혼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불평도 불만도 없이 살아왔다. 아들 딸 12남매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 부모와 우리 형제들은 우리가 정하였느냐? 그렇다면 우리 내외를 우리 부모가 정한들 어떠리오! 얼마나 좋도록 정해주셨을 것인고! 이것은 자기의 말과 같이 자유결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신뢰하여야 할 자녀의 태도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변호사 개업당시에 매일 요정 출입은 부득이하게 되었다. 점차로 외도를 하게 되었다. 무학한 부인이 아무 내조가 안된다고 느껴졌다. 소실을 들이기로 부인의 승락을 받았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연령이 40세가 되거던이라는 것이었다. 아직도 몇해를 기다려야하였다. 그래도 그는 좋아하였다. 그런데 때가 오기 던에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근 20년 전에 그는 감리교의 세례를 받고 수년 열중하다가 냉담되고 말았던 것이다) 문제는 일변이다.
『늘 둘이 함께 교회에 간다 성체난간 앞에 그녀와 나란이 장궤할 때마다 나는 솟구치는 환희와 경의를 느낀다. 그것은 합환주례(合歡酒禮)가 나날이 변형되는 것 같다. 결혼 자체가 아침마다 갱신되는 것 같고 갱신할 때마다 둘이의 사랑이 깊어졋다. 나는 속으로 말한다. 오! 그리스도여! 어쩌면 이렇게 될 수 있읍니까! 제가 꿈꾸고 있읍니까 혹은 이것이 실지 체험입니까? 당신은 우리 생활을 연달은 밀월여행으로 만드시니 우리 지상생활은 앞으로도 계속될 밀월여행의 서곡입니다. 오! 그리스도여 저희들의 마음이 당신의 사랑 안에 결합되었아오니 둘 중에 아무도 당신으로부터 떨어지지 아니하는 한 저희들이 어떻게 떨어지겠읍니까? 당신의 성심 안에 저희들의 가정을 찾앙ㅆ아오니 저희들이 찬류에 있다고 누가 말하오리까? 오! 천주시어! 당신의 의지(意志)는 저희들의 희망이오며 당신의 의지는 저희들의 자유입니다』(P 138)
어찌 부부애만 이러하리오 나아가서 부모와 자녀도 그렇고 같은 민족 같은 인간, 생사를 막론하고 모든 존재가 당신 성심에 결합됨으로써 서로가 결합되는 거룩한 단체가 곧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것이다. 여기에 진정한 인류의 목적 사명 발전이 있는 것이다. 인류는 창조의 협력자요 구속의 협력자로서 한 우리와 한 목자인 것이 아니냐? 이 유대가 곳 사랑이다.
『사랑은 그 얼마나 놀라운가! 그것은 일체의 창조자다. 그것은 우주의 최고원칙이다』(P 219) 이러한 사랑에 있어서는 만인이 결합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본 기녀(妓女)들 가운데 성녀가 안될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다.…… 한 계집아이가 토로한 사정은 봉양할 노모와 졸업할 남동생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 여자를 생각한 때마다 스스로 심각한 참괴(懺愧)를 느끼는 것은 내 천성이 그 여자의 반만큼도 헌신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목마르다』고 하신 이유를 알겠다. 내가 생각컨대 그리스도께서는 특히 사회제도의 희생자인 이러한 영혼들에 목말라 하신다』(P 142)
(나는 길게 한숨을 쉬고 있다) 그는 친지, 동료, 친척들의 구령에 열중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동료 <프란씨스>의 입교를 권하다가 권하다 못해 하루는 동행중 마침 어떤 성당에 들어갔다 <프란씨스>는 밖에서 기다리겠다 한다. 『나는 들어가서 바로 제대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우리 모후(마리아)께 여쭈었다. 『좀 보세요 어머니! 한 아름다운 영혼을 우리 교회의 문턱까지 데리고 왔읍니다. 저는 할대로 다 했읍니다. 그 나머지를 당신이 해주십시요. 어머니 어떻게 저를 버리시겠읍니까? 결국은 어머니 이게 저의 일만이 아닙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복되신 어머니 앞에서 울었다… 나흘째 그가 와서… 웬일인지 몰라도 나는 빨리 영세하고 싶어… 하였다』(P 263)
(나도 이 대문을 읽으면서 울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이렇게 쓸량이면 이 책을 전부 옮겨야 할 것 같다. 나는 물론 법철학을 모르는 고로 인용할 자격도 없다. 그러나 그의 법학관의 모색이 신앙에서 울어 나온 것은 틀림없다. 이리하여 그는 슬픔을 극복하였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빛이오 나는 생명이오 나는 길이요 나는 부활이다』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슬픔도 기쁨과 함께 있다. 그러나 슬픔은 기쁨을 달갑게 하는데 쓰일 따름이다. 슬핌이란 나이를 먹는 슬픔이나 기쁨이란 「영원한 기쁨」이다』 (P. 370)
나는 역자 김익진 형에게 충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다년간의 노고가 천주께 큰 영광이 되기를 빌 뿐이다.
한솔(前 慶北大 文理大學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