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국민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재건국민운동은 그 이상이나 실천강령을 들여다 볼 때, 이것은 순수한 생활 운동으로서 재래의 모든 폐습을 타파하고 박차고 나서서 신생활(新生活)을 영위할 수 있는 생활 환경을 조성(造成)하자는데 있는 것이다.
이에 원칙적인 동의를 적극적으로 표시해오던 서울교구에서는 이번에 재건운동 천주교 서울교구 촉진회의 결성을 보기에 이른 것이다. (본보 296호 참조) 경하해 마지 않는 바다.
회고컨데 생활운동과 교회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가령 몇일 전 재건국민운동본부는 최고회의 의결을 거쳐 관혼상제의 간소화와 생활기풍(氣風)을 확립하기 위한 국민표준의례(儀禮)를 발표했다. 거기 보면 상례(喪禮)에 있어서는 혼백(魂帛=神主) 대신 고인의 사진으로 대치하고 사주궁합 등에 의한 약혼제도를 폐지하라고 했다. 이런 것은 이미 백수십년 전부터 한국의 가톨릭신자들이 엄히 실천해 온 바다. 이점에 있어 한국 가톨릭 신자는 그 선구자들인 것이다.
가톨릭신자들은 매주 금요일마다 육식(肉食)을 폐지하고 또한 4순절 동안은 그날마다 1식(食)을 완전히 폐지하여 재(齊)를 지키고 있다. 이것은 또한 내핍생활(耐乏生活)을 강조하는 재건국민운동의 정신과 완전히 일치한다.
교회가 실천하고 있는 각종 애덕(愛德) 사업으로 말하면 버림받은 영아에서 양로(養老)에 이르기까지, 불구자를 돕고 전쟁미망인의 직업을 지도하고 있으며 많은 자선병원과 폭넓은 구라(救癩) 활동을 꾸준히 계속하고 있다. 그것도 40년, 50년의 실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들을 들머겨서 공담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그러나 교회는 영성적 생활과 똑같이 현실생활을 얼마나 중히 보고 있느냐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계명으로서의 사랑을 실천하기에 그와같은 사회사업을 적극적으로 경영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 안에 생기는 불행을 보고 그것을 즉시 제거(除去)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이런 효과적인 사회사업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해방 후 한참 좌익이 성할 때 어느 청년이 교회경영 고아원을 찾아와서 『사회전체의 개조 없이 이런 사업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겠느냐』고 대들었다. 그때 겸손한 수녀 한 분은 대답하기를 『당신이 말하는 어려운 이론은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만 사람이 열명만 모여도 그 중에 약하고 불쌍한 자가 나오지 않아요』라고.
그런 것을 목격하는 즉시로 구조의 손을 뻗치는 것이 곧 애덕사업인 것을 짐작한 그 젊은이는 깊은 감동을 받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지금 전주(全州)에는 「CCDEH」라는 가톨릭 평신자의 생활지도 단체가 활발한 봉사를 하고 있다. 그들은 젊은과 학식을 겸비한 구라파인들이다. 생활조건이 가장 나쁜 곳을 택해서 한국 농민들과 같이 기거하면서 기술을 가르쳐주고 혹은 생활 개선에 몸으로 모범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상은 경제와 「휴매니즘」을 병행시켜 가는 데 있다.
가톨릭 신용조합(信用組合) 및 노동청년회(JOC) 등 역시 단순한 포교활동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생활 개선과 보다 나은 환경의 조성(組成)을 실천하고 있는 사회적 기구(機構)인 것이다.
이렇게 교회는 현실생활을 중히 여기고 있으며 또 그 실천을 착실한 방법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 아니다. 이런 기구(機構) 등은 국제적인 연관을 맺고 있어 항상 서로 교류(交流)하고 있다. 오늘 고립된 국가생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와같이 국제적 유대를 긴밀히 맺고 있는 이같은 종류의 단체가 그 이상이나 방법에 있어 끊임없이 새 「테그닠」을 그리고 효과 있는 원조마저 받아들일 것은 자명하다.
다만 교회와 재건국민운동간의 관련을 한 원칙에서 언급하면 교회는 초자연질서(超自然秩序)를 최종목표로 영성적인 지도에 있어 먼저 신법(神法)에 의한 명령을 하고 있는 자이다. 이를 복음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저들이 돈 한 푼을 예수께 드리거늘 예수 가라사대 「이모상과 및 기록한 것은 뉘것이뇨」 이르되 「<세살>의 것이니다」 이에 가라사대 「그러면 <세살>의 것은 <세살>에게 바치고 천주의 것은 천주께 바치라」하신대 저들이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이것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초자연질서와 현세(現世) 질서를 구분하고 또 그 관계를 말한 것이라고 하겠다.
지금 한국에 정교(政敎)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와 국가의 직분(職分)을 논의할 필요성은 추호도 없다. 우리는 지금 가장 완전한 민주주의를 지향(志向)하고 있는 거와 같이 그 관계 또한 가장 완전한 것을 염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재건국민운동은 오래 쌓인 폐습과 비합리적인 생활방식을 타파하고 다시 일안에 복지국가를 세우자는데 그 취지가 있는 만큼 정성껏 이에 나서기로 그 촉진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가톨릭신자들은 각기 그 직장과 직역(職域)에서 모범적인 일을 다하고 있는 줄 안다. 그 위에 또 이같은 촉진회를 결정한 것은 가톨릭 생활관(生活觀)을 더욱 뚜렷이 선양(宣揚)하자는데 큰 뜻이 있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오직 묵묵히 신앙생활을 영위하므로 중인(衆人)의 빛이요 소금이 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