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실험(核實驗) 경쟁이 치열하던 끝에 또다시 전반적 군비축소(軍備縮小)를 논의하고 있어 이것은 마치 양자를 교호(交互)시키고 있는 인상을 준다.
이런 세계문제(世界問題)와 그 뒤에 혹은 그 뒷받침이 되고 있는 이념(理念)을 돌보고, 그리고 반성할 만한 일이 허다하다.
흔히 말하는 동·서(東西) 또는 공산세계와 자유세계로 구분(區分)한다기 보다 아주 이분(二分)하고서 일일이 대립(對立)해 가고 있는 그 사상적 배경(思想的 背景)을 중시(重視)하면서 그 양립(兩立)의 연유를 찾아보고자 한다.
1917년 「러시아」의 공산혁명은 그 사회적 정치지리학적 무게를 생각해 볼 때 특히 오늘 양단(兩斷)된 세계 정세에서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인류사(人類史)에 큰 기원을 작만한 것이 분명하다. 아마 제5세기 「로오마」 제국의 몰락 이후 가장 큰 인류의 정치적 변동이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앞에 지적한 동·서의 대립은 1945년부터는 「쏘베트」 외교정책에서 더욱 구체화되어 갔던 것이다. 동(東)의 대부분을 「크레므린」에 예속시킨 지난 15·6년 간의 역사적 기록은 어느 의미에서는 제정(帝政) 「러시아」의 팽창적책을 그대로 답습했다고 단정할 만하다. 그들의 야망은 무엇인가? 먼저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부동항(不凍況)을 구하는 것이었다. 「발칸」반도에서와 그리고 「발틱」 해안에 군사적 거점을 두고자 한 것이었다. 이런 그들의 욕구가 오늘 「크레므린」에 의해서 수행되고 있는 사실을 어느 순수한 공산주의자도 부정치 못하리라.
「맑스」주의에 있어 인간은 한 물리적 그리고 화학적 복합체(複合體)인 것이다. 하나의 고도로 발달된 __ 동물이요 기계를 __ 수 있는 지극히 편리한 __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___에다가 기계를 부릴 수 있는 능력에서 오는 그 정도의 정신성(精神性)을 인정할 뿐, 인간의 본성에서 오는 자유(自由)와 의지(意志)를 추호도 인정하지 않는다. 영성(靈性) 및 그 운명을 상상하지도 못한다. 혹은 고의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인간은 그저 물질을 사용하고 변경할 수 있는 자로만 또 그것이 그 본문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렇게 전단(全_)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그 정치적 경제적 모든 체계가 전제국가(專制國家)를 완성해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다만 한 기계로서 혹은 어느 기계를 부리는 기계로 되어 있을 뿐이다. 공산국가 안에서 인간이 개나 도야지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다. 개나 도야지 보다는 값이 더 있는 줄 잘 알고있다. 그러나 「터럭타」나 말(馬) 보다는 못한 것이다. 모든 것을 물질적 값(價値)으로 책정하기 때문이다. 가령 유능한 인간은 「터럭타」나 말보다 값나갈 수 있다. 그런 자는 오직 몸을 농업전선(農業戰線)에 바치고 큰 농장을 조종할 만한 능력을 가진 자인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이 「쏘베트·러시아」의 사회사태를 다 설명한 것은 아니다. 허나 적어도 「맑시즘」의 인간관(人間觀)만은 철저히 그러한 것이다.
「유엔」의 인권선언(人權宣言)을 기초(起草)하던 무렵 여기 맹반대를 한 것은 쏘련 대표였음을 세인은 다 기억할 것이다. 거기 유명한 「토마스.래프슨」의 문구인 『만인은 동등히 창조되었다』는데 가서 「창조」란 말을 삭제(削除)하자는 것이 그들의 트집이었었다.
『창조되었다』는 뜻은 『창조자』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므로 그들 공산 「도구마」와 철저히 위배(違背)된 것을 안 때문이었다.
사실 정치의 사조(思潮)를 되돌아 볼 때 그것은 간계(奸計)와 불신(不信)에 충만한 것이요 그것이 지나처서는 불가지(不可知), 무신(無神)에 흐르고 드디어 노예구사(驅使)와 「마키아베리즘」을 일삼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세상 시작과 같이 비롯한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쉽게 말하는 동·서의 대립이란 것은 실로 근본적인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정치형태나 지역적인 그것이 아니라 이념(理念)의 심각한 구분인 것임을 알 수 있겠다. 그것은 곧 「크리스티아니티」에 대한 「콤뮤니스트」의 「이즘」을 달리하는 상극(相극)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국제외교정책의 사상성(思想性)을 생각할 수 있다. 오늘 한국의 현실을 그대로 말하더라도 이 대립(對立)간에 부동(浮動)하고 있을 수는 없다. 오히려 이 대립의 선두(先頭)에 서 있으며 그 때문에 막대한 희생을 지불해 왔고 지금도 그런 처지에 있다.
만일 정치외교란 것을 한갖 정치의 기술로 여긴다면 이에 더한 오산(誤算)은 없겠다. 또 핵무기 같은 것을 앞장세운 다는 것도 무모한 것일 것이니 적(敵)은 이념(理念)으로도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 유명한 <룸바르디> 신부는 우리의 이념은 복음성서 안에 다 있다고 했거니와 우리가 만일 철저한 신앙과 또한 신앙으로서 자모이신 교회의 가르치는 바를 익혀 알아듣고 행동한다면 그것은 곧 이 이념전(理念戰)에서 전투태세를 갖춤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자중(自重)할 의무마저 있다. 우리가 아니고서 능히 이같은 결정적 자리(位置)를 대신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근간 주한교황 사절의 정례(定例) 행사인 지방순시(巡視)에 있어 신자들 뿐 아니라 일반 시민이 호응해서 열열히 환영하는 연고도 이 국제외교의 사상적 성격을 차츰 터득하게 된 발로인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