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3대주교구(大主敎區)가 설정된 것은 이로써 완전한 한국교회의 성직계통(聖職階統)을 수립한 것이 된다.
우리는 아직도 대주교에 관한 상식이라 할까 알아들만한 지식에 빈곤하다. 우선 교회법상으로 명시된 것과 몇 관례(慣例)를 살펴보자.
먼저 서방(西方) 교회와 동방(東方) 교회간의 다소이 차이(差異)를 보여준다. 서방에 있어서는 대주교의 권한은 교회법(까논법)의 정한 바에 의하여 대주교에 소속된 관구(管區) 내의 각 교구에 한정된다. 대주교는 일정한 관구를 가지는데 그 관구내에는 여러 교구가 포함된다. 가령 서울대주교관구 내에는 인천교구 춘천교구 그리고 대전교구 등이 동 관구에 소속된 교구인 것이다.
각 소속 교구의 주교들은 대주교의 속(屬) 주교이요 대주교는 그들 속(屬) 주교의 수부(首府) 주교가 된다. 대주교 자신은 한개의 속 주교를 차지하는데 풀어서 말하면 대주교 자신의 한개 교구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허나 「웨스터민스터」 대주교는 다섯개의 자체(自體) 교구를 차지하고 있는 특례도 있다. 대주교가 그 자체의 속교구를 가지지 않을 때는 그는 관구대주교 또는 수부주교가 아닌 일정의 명의(名義) 대주교로 호칭된다.
대주교는 매20년에 1차의 소속주교들을 소집하여 관구회의를 개최해야 한다. 그리고 대주교는 관구내의 필요에 의하여 이심판정(二審判定)을 설치할 수 있으나 각 속(屬)교구에 대한 간섭(干涉)은 법률에 의한 엄중한 제한(制限)을 받고있다. 대주교는 백(百)일 은사를 베풀 수 있으며 이런 모든 권한은 「빨리움」을 받은 즉시로 행사할 수 있다. 동방교회에 있어서는 좀 복잡한 계통을 가지고 있으나 결국은 대주교와 주교로 구분된 근본계통에 변함은 없는 것이다. 총대주교도 한 대주교로 보면 대과없다.
1931년 「조선교구설정 백주년」 기념 경축을 지냈다. 그 당시 서울교구 및 대구교구는 교구설정으로부터 이미 20년을 경과한 때였으며 또한 원산 및 함흥교구 그리고 영길교구와 평양교구도 당당한 한 교구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후 계속해서 광주 춘천 그리고 전주교구 등이 들어서게 되었으나 일제(日帝)의 종교탄압은 각지에서 교회발전에 치명상을 입혀주었다. 이런 해방전사(前史)는 1945년 8월 15일을 참으로 위대한 날로 맞이하게 해주었다. 해방후 비약적으로 괄목할만한 발전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면서 교구설정의 역사를 뒤돌아 볼 때 그 뒤에 스며든 많은 수고와 희생을 관과할 수 없는 것이다.
바꿔말하면 어느 시대의 각광(脚光)을 받아 실속 없이 성장한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한국가톨릭의 그 혹독한 박해 등을 읽어볼 때 더욱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사 안에 전체교회사의 인과(因果)를 찾아볼 수 있다면 너무 대담한 표현일가? 한 선교사(宣敎師)만으로서는 다할 수 없는 많은 역사적 의미(意味)를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는 것인줄 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세대에 와서 완전한 교회의 체제(體制)를 수립한데 더 큰 자랑과 보람을 느껴야 할 일인가 한다. 비오 12세께서는 『교회는 평신자이다』고 하셨다. 평신자 없는 교회를 상상해 볼 때 이 말씀의 절실한 뜻을 알아들을 수 있겠다. 본란이 누차 지적했음과 같이 평신자의 조직을 체계화 한다는 것은 이제와서는 지상과제인 것이다.
평신자의 「악숀」 조직은 자기 성화(聖化)를 목표로 하는 것이겠지만, 그 사회적인 성격(性格) 등에서 생각해 볼 때 교회성립의 한 요소(要素)로서도 불가결한 것임을 재강조한다. 가령 대주교가 설정되고 각 교구는 자치의 본주교 교구로 승격되었다는 사실을 목전에 두고 그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은 더 근본적으로 각자는 교회의 일원(員)이란 자각을 제 스스로 하기보다는 역시 어떤 조직을 통해서 더욱 긴밀히 교육되고 느낄 수 있음은 자명하다.
「바티깐」미술관에 이런 그림이 있었다. 한 건장한 노인이 어린 소년의 손을 잡고 험한 산길을 지나고 있다. 숲은 우거져 사방은 어둡고 길은 여러갈래 갈라져 있어 안내자 없이는 갈피를 잡기 어려울 듯 하다. 그림의 표제를 「교육」이라 해둔 것을 기억한다. 이제 우리는 그림의 그 소년은 아닌상 싶다. 우리가 만일 신앙에서 우러나는 온갖 힘을 발휘한다면 찬란한 앞날을 속히 꾸며갈 수 있겠다. 지금껏 바쳐온 모든 성의(誠意)에 배가되는 현저한 노력과 또 모든 어릿된 생각에서 나온 일부 신자들의 막연한 의존심 등은 실시에 불식(拂拭)되어야 하며 더욱 참된 바탕에서 가뭄(旱天)과 장마에 대비(對備)하는 슬기로움이 요청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