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4일, 「로오마」에서는 금상(今上) <요안> 23세 성하의 80회 탄신을 성대히 축하하고 성 베드루 대성전에서의 <모띠디> 추기경이 집전하는 대례미사에 이어 50여 각국 대표들이 하례를 올렸다. 이날은 대관 3주년을 맞이하는 날이다.
<요안> 23세 성하의 80 탄신을 충심으로 경축하는 뜻에서 여기 그 생애를 적기로 한다.
그는 1881년 11월25일, 북이(北伊) 「벨가모」교구 「쏘또 일 몬떼」라는 데서 한 농가의 10형제 중에 태여났다. 세 형과 한 누이가 아직 생존 중이며 부친은 81세에 자당은 85세에 서거했다.
1904년 8월一十일 약관 22세 때 사제위에 서품(叙品)되고 곧 「벨가모」주교의 비서로 1914년까지 동직에 있었다. 그동안 동 교구 신학교에서 수업을 맡기도 하고 자기대로는 역사공부에 열중했다. 동 교구의 역사를 거의 완전히 정리했다고 한다. 제1차 대전중에는 위생병으로 출전했다가 계속해서 종군신부 근무까지 했다.
전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주로 학생지도에 전념했다. 「학생의 집」을 짓고 공립학교에 다니는 학생드르이 특별지도에 그의 창의(創意)를 바루히했다.
그 당시 교황 <분도> 15세는 그를 「로오마」로 부르고 이(伊) 신앙흥포회를 재조직케 하는 한편 동전국회의 회칙을 기초(起草)케 했다.(1921년)
1925년 <비오> 11세는 그를 「불가리아」 교황 순찰사(巡察使)로 임명, 같은해 3월19일 명의대주교위에 올렸다. 1930년에는 동직책이 교황사절로 승격했다. 이때부터 외교관의 편력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주교가 된 그는 「터키」와 「그리스」 주재 교황사절로 전임되는 동시에 「콘스탄틴노풀」의 라띤교회 대목(代牧)을 겸임하는 중임을 맡게되었다.
1944년 12월, 그는 일약 주불(駐佛) 성청대사에 임명되었다. 이때는 「바티깐」과 불정부 간에 외교상 긴박한 사정이 중첩하여 그의 수완에 기대할 만한 것이 모두이었다. 「비키」정부가 넘어지고 「페땅」내각이 좌왕우왕하는 가운데 「레지스땅스」 지도자들은 그 화살을 성청대사에 쏘아붙이고 있던 판국이였다. 이러한 공기 속에서 그는 우의(友誼)와 신임(信任)을 만회할 수 있었다. 1945년 2월에는 불란서 정부가 철학자 <쟉크.마리땡>을 주 「바티깐」대사로 임명했는데 이것은 그가 주불성청대사로 부임한지, 불과 3개월 안이었던 것이다.
주불성청대사 「론깔리」대주교로 외교계에 알려진 그는 1953년 1월12일 추기경에 임명되고 다시 「베니스」총주교로 영진했다. 「론깔리」 추기경이 불란서를 떠남에 즈음하여 불정부는 그를 「레지온 더 놀」(불란서 최고훈장)의 사령관으로 무쌍의 영예를 수여했다.
1953년 3월15일 그가 「베니스」 총주교로 돌아왔을 때 71세의 고령인 탓도 있었겠지만 사람들은 한 은퇴자를 맞이하듯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성 「말구」대성당 강론대에 올라선 그는 먼저 <비오> 12세 성하께 존경과 감사를 표시하고 자기는 그토록 원하던 사목생활로 돌아왔다. 오늘 외교관 생활을 끝내고 양떼를 맡는 목자의 본 생활을 찾게되어 기뻐 날뛰고 싶다고 했다. 이말은 중외(中外)에 큰 감명을 줄 수 있었다. 5년간의 총주교직에 있는 동안 관하의 각 본당을 빠짐없이 방문했고 30여 본당을 신설 건축했다. 특히 주력한 것은 가톨릭·악숀이였으며 거기 요긴한 모든 시설을 완비하는 등 마치 젊은 힘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고 한다.
3년 전 <비오> 12세의 후계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의 연령은 76세이었다. 그 때문에 한 과도(過渡)의 직능을 감당할 분이거니 하는 인상을 주었다. 이는 그의 생애를 그리고 그 능력을 전혀 알지 못한 항간의 편견에 지나지 않았다.
앞에 말한데로 1958년 11월14일에 등극(登極)한 <요안> 23세 성하께서는 같은달 17일 새로 추기경 23명을 지명하고 그해 12월15일까지 정식 임명을 끝낼 수 있었다. 이로써 추기경 정원은 75석이 되어 사상(史上) 두 번째로 많은 추기경 정원에 도달했다.
다음해 1958년 1월25일 성하께서는 공의회의 소집을 하겠다는 의향을 개진하여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것은 교회의 전반적 이익을 위한 것이요 또한 천년묵은 교회일치의 대과업을 진첩시키기 위한 것이다.
「까논」법의 개정을 준비시키고 「로오마」교구회의를 열어 제반규률을 재신(再信)하는 등 이루 매거할 수 없는 역사적인 거사(巨事)를 단시일에 과감히 실천에 옮겨갔다.
또한 다시 일안에 요긴한 회칙이 거듭 발포되어 교회의 지표를 뚜렸이 하였다. 그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인의 일치, 평화의 바탕 특별히 매괴신공을 강조한거와 「마뗄 엩 마지스뜨라」 대회칙을 반포한거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안> 23세 성하께 얻는 인상은 『민중의 교황님』이구나 하는 것이다. 그 평이한 말씀, 거두실 줄 모르는 미소, 담담한 몸가짐이 민중을 끌어당기는 것 같고 또 파고 드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언젠가 성하께서는 예고없이 「로오마」시 장터로 나와 하층 민간의 목메이도록 부르는 『교황만세』에 응답하신 일도 있다.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체온(體溫)에서 그 매력을 여징벗이 뿌려 오늘의 교황님으로서 또 우리의 자부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옆에 다가서,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기를 아끼지 않는 전세계 모든 신자와 및 인류의 축복에 쌓여 오늘 탄신을 맞이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