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처년전 이 지구의 한 구석에서 살다가 한 사형수(死刑囚)로 책형(磔形)되고 매장된 그가 오늘날 아직도 그의 위대한 원생명(原生命)을 우리들 사이에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있다. 그뿐이랴 그는 산 어느 인간보다 더 생활하며 현대의 모든 고뇌(苦惱) 모든 인간적 협량(狹量)과 한계를 넘고 또 서로 반목(反目)하는 국가와 민족들, 우리들의 사랑하는 이들의 모혈(募穴)을 넘어서 오늘도 아직 그의 반짝이는 흰 성체(聖體)로서 초연히 현존(現存)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만이 오직 모든 살이와 죽은 이를 가장 내밀(內密)히 일치시키며 그만이 우리의 참 고향이며 그만이 홀로 우리의 영원의 생명임을 우리가 눈에 볼 수 있는 어떤 것 보다 우리는 그를 더 열렬히 사랑하고 있음을. 우리도 그의 친제자(弟子)인만치 충성되이 그를 증거할 수 있음을. 진실된 그리스도교도의 삶은 종도들이 그당시 피로써 증거한 바를 새로운 청명한 울림으로 외치는 것에 다름없는 것이다. <그는 부활하였다. 우리는 그의 증인이다.>』(카를 아담)
우리는 주 그리스도의 부활한 사실(史實) 및 그 사실(事實)을 엄정(嚴正)한 의미에 있어 영원한 역사(歷史)의 현실이라고 한다. 영원한 현재요 그 장래라고 한다. 그러나 영원을 부인(否認)하는 자들 앞에서는 한 조소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그같은 조소도 또한 역시 영원한 조소일 수 밖에 없다.
<카를 아담> 신부의 말대로 『그는 산 어느인간보다 더 생활』하고 있어 영원한 것을 수락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반발(反撥)케 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그 중간(中間)은 인정될 수 없거나 심히 불안정하고 희미할 뿐이다.
그때문에 오늘 부활주일은 우리 안에 부활의 참뜻을 신비(神秘)스럽게 색여(刻印)주어 하여금 우리 각자의 부활을 보증해주었다.
우리는 지금 국가민족의 운명을 걸고 참 민주적인 복지국가를 건설하려는 거대한 동원(動員)을 감행하고 있다. 허지만 그 모든 동력(動力)과 협의 원천(源泉)은 인간안(內面)에서 용충(湧出)한다는 것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구호삼아 부르는 「人間革命」인 것이다. 인간혁명이 모든 건설에 선행해야 할 것임을 뼈져리게 느끼고 있는가? 여기 관건은 쥐어져 있다고 해서 과언은 아닐 것이다.
역사에서 보는 흔한 혁명들에서 무슨 교훈을 얻으려는 노력은 아무리 좋게 본다해도 가장 값있는 평가를 해줄 수는 없다. 혁명에 혁명문학이란 것이 뒤따른다고 한다. 소위 혁명문학이란 것은 정치와는 구별될 수 있었지만 한갖 선전경향을 넘지 못했다. 인간 안에서가 아니고 인간밖에서 인간을 끌고가려 했음이 분명했다.
하루 저녁에 솟아오른 혁명의 불길처럼, 그같이 인간혁명도 성취될 수 있다고 믿어서 무방하겠는가? 그같은 안이(安易)한 기대를 걸어도 좋을 것인가? 오히려 『인간혁명은 불가능하다』는 탄식과 실망의 소리만 드높아가고 있다. 소위 인간혁명이 <네오 호모> 즉 새 인간을 약속한 것이라면 인간존재(存在)의 올바른 위치를 먼저 정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충고할 말이 적지않다.
5·16 군사혁명 이후 쉬지않고 호소하다 싶이 하는 인간혁명은 대체를 말해서 양심(良心)을 되살려서 과거와 같은 부정과 부패를 제현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무정과 부패를 일소(一掃)하자는 것이 곧 혁명질서(秩序)인거와 같이 국민 각자는 거의 완전한 양심을 회목해야만 한다. 양심의 명령(命令)대로 행동하여 인간 사이의 신의(信義)를 재생시켜야만 한다.
이에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그 근본(根本)과 방도에 있어 얕은 형식이나 천박한 선전술책을 조속히 지양하고 진정(眞正)한 인간의 값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최선의 의미에 있어서 인간의 진정한 값을 찾아주는 자기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 결국 「인간혁명」의 효과를 얻어 혁명된 인간은 인간의 값(價値)을 찾은 자인 것이다.
오늘 그리스도의부활을 기억하며 동시에 우리 모든 이에게 이미 확약(確約)된 각자의 부활을 상기하는 마당에 또한 혁명질서하에 있는 제 둘레를 직시(直視)해야한다. 부활을 자기존재(存在)와 똑같이 신앙하는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자신을 살펴야 한다.
일본 6천만 불교도의 지도자인 <엔따이>씨는 일본 불교의 살길(活路)은 가토리시즘을 도입하고 가톨릭 악숀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다. 가톨릭 악숀이란 가톨리시즘의 생활화(生活化)인 것이다. 만일 가토리시즘을 생활화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현실과 동 떨어진 피안(彼岸)의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종도들이 그당시 피로써 증거한 바를 새로운 청명한 울림으로 외치며』 <그는 부활하였다. 우리는 그의 증인이다.>고 하기에는 제 분야(分野)와 제 직분(職分)에서 먼저 자기부활을 명심하는 자의 자자영영(孜孜營營)히 생활하는 생활인이 되는 길밖에 없는 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