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5월, 어느 세시기(歲時記)의 푸념이 아니라 바로 마돈나의 거룩한 달이다. 얼른 머리를 스치는 것은 누구의 시구(詩句)에 있었던가, 나의 성모화(聖母畵)는 때묻은 무명옷 옷자락에 감싸인 예수아가면 어떠랴 -한 것이다. 생활에 때묻은 성모님의 행주치마자락이 절실히 느껴진다. ▲또 연상(聯想)되는 것은 어느 문학 강연에서 얻어 드른 것이다. 『현대인은 「이데오르기」에 희생당하고 있다. 「이데오르기」란 이름 때문에 뭇사람이 귀중한 인간을 상실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소설가 <폴커너>는 『차라리 「이데오르기」가 없는 구약성서만 읽었다』라고. 물론 공산 「이데오르기」를 비판한 표현이다. ▲인간의 상실(爽實)을 생활의 상실과 같은 뜻으로 잡아도 무방하다. 때마침 재건(再建)을 심각히 외치는 마당에 있으니 우리의 생활관(生活觀)을 좀 더 선명히 드러낼 말하다. 우리는 과연 현실과 생활에서 도피(逃避)하고 있는 자인가? 그런 짓이 천주대전에 어떠 평가를 받을 것인가? ▲우리의 생활 감정(感情)에서부터 더 순화(淳化)되어야 할 일이 적지 않다. 옥스포트의 가톨릭 학생구룹들은 모임때마다 「아가페」를 즐긴다. 「아가페」는 이렇게 한다. 여학생들이 저녁 찬거리를 장만하면 그동안 남학생들은 묵주신공을 드린다. 저녁상을 다같이 즐겁게 나누고는 제밥값을 치룬다. 영국돈 9펜스쯤인가? 마뭏든 커피 한잔값 밖에 안된다. 이렇게 「아가페」를 끈태고 여유있게 모임을 진행해간다. 「아가페」란 말조차 부드럽다. 초대 크리스챤들이 사랑의 만찬을 나누었던 유래에서 온 것이다. ▲모임과 시사 문제는 시간의 제약도 있고 그 조절이 힘든다. 그 비용 문제는 더 어렵다. 우선 누가 부담하느냐? 하는데 이으러서는 두 손을 들 수 밖에 없고 꼭 성찬을 앞세우는 축도 있어 거창하게만 벌리는 우리네 버릴 수 없는 습성 때문에 「아가페」란 우리 실정에 맞지 않을지 모른다. 돈을 제각기 내다니? 인색하게! 여대생들이 장바구니를 들 수도 없고 남자가 설거지를 할 수도 없고 하니 안될 것만은 분명하다. ▲소위 역사상의 옥스포트 운동은 가톨릭학생들의 생활운동인 것을 「아가페」를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이 한국나그네의 입에도 소박한 저녁을 즐기고들 있었다. 진정 「아가페」는 사랑의 잔치. 사랑은 음식의 맛조차 낼 수 있었던가? <황홀한 「성모의 밤」>만을 꾸미려는 대학생들에게 기 글을 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