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8일부터 12월6일까지 인도 「뉴·데리」에서 개최되는 프로테스탄트 각 교파(敎派)의 세계교회회의(WCC)에 성청은 공식 「옵써버」를 파견했다. (11월19일, 본보 303호 참초)
이것은 사상(史上) 처음된 일이다. 프로테스탄트 그리고 「올토독스」 등 175 각파 교회가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이 회합에 성청은 과연 어떤 의향으로 5명의 공식 「옵써버」를 파견한 것인가, 그 연유를 밝혀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가톨릭은 이 회합 자체가 교회통일을 목표삼고 있는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프로테스탄트 각 교파들이 보다 더 돈독(敦篤)한 우의를 도모(圖謀)하려는데 큰 존경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은 이 프로테스탄트 세계교회회의에 두 가지 근본적 태도로 임(臨)하고 있다. 하나는 교리적 요소(要素)이요 다른 하나는 비(非) 교리적 입장인 것이다.
그런데 이 세계교회회의를 역사상으로 살펴보면 1925년의 「스톡호름」회의 그리고 1927년의 「로잔느」회의 등이 다같이 『교리는 달리하되 봉사에 단합하자』는 「슬로간」을 내걸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각 교회가 일치(一致)를 심각히 부르면서 교리적 차이(差異)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는 그리스도교 일치에 근본적인 난관이며 필경 상호의 이해(理解)를 결(抉)하게 하 ㄴ것인줄 생각된다. 그들 가운데는 종교를 한 인간감정(人間感情)의 소산(所産)으로 돌리는 설(說)도 나오게되어 1928년에는 그 당시 <비오> 11세께서 회칙으로 이를 단죄(斷罪)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 가운데는 교회일치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끊임없은 노력과 연구를 거듭하여 그리스도교 일치에 건전한 바탕을 닦은 이도 적지 않다.
세계교회회의(WCC)가 정식으로 발족한 것은 1948년이다. 그때 이를 정의(定義)하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하느님이요 구세주임을 승낙하는 교회들의 단합』을 꾀한 것이라 했다. 이 정신은 저명한 그 지도자들이 그대로 받들고 있는 터이다. 동(WCC) 사무총장 <후프트> 박사는 『우리는 오직 말과 행동으로 긍정할 것이니…… 오직 우리가 일치하려는 바는 진리(眞理)에 순종하는 일치인 것이다. 우리가 한 우리 안에 한 목자 밑에 부르심을 받도록 일치를 구하고 있는 연고이다』라고 선언하였다. (1955년 10월)
이런 생각은 진보적인 견해인 것이며 또한 가톨릭교회가 완전히 수락할 수 있는 것으로 크게 주목되어 왔었다. 성청은 그들의 성명을 자세히 분석하고 어떤 것에는 많은 경고를 보내면서도 이같은 진보적인 그들의 접근(接近)을 환영하고 고무(鼓舞)하여, 하여금 교회일치에의 노력에 박차를 가해왔다. 여기서 필히 알아둘 것은 성청은 그들의 어떤 건전한 견해를 높이 평가했을 뿐 그밖의 무슨 암시(暗示)를 전한 일은 없는 것이다. 이에 작용될 것이 있다면 혹은 힘입을 것이 있다면 다만 천주성총에 의지(依持)할 길밖에 없다. 그 때문에 교회일치를 위한 기도를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런 기도(祈禱)는 한 공동행사(共同行事)로 지냄으로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방금 구미(歐美)에서 활발히 실행되고 있는 교회일치를 위한 기도행사에는 프로테스탄트 이웃을 초대하고 함께 무릎을 맞대고서 성서연구를 하고 하는 것으로 「로오마」의 뜻을 실천하고 있다.
저 「나치스」 때는 독일의 모든 교회가 형용할 수 없는 박해 아래 있었다. 그 때 「나치스」라는 공동의 적을 목전에 두고 참으로 인정어린 교회간의 교통이 실현되었었다.
지금은 무신론적 공산주의의 보다 지독한 핍박을 도처에서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때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형제간에 화목이 없다면 이는 곧 적(敵)의 노리는 바에 장단맞춰줌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다행히 이번 프로테스탄트 세계교회 「뉴·데리」 총회는 앞서 지적한 교회일치에의 좋은 정신을 표방하고 있으며 또한 175 각파 교회를 회동(會同)시킬 수 있음에 감(鑑)하여 성청은 5명의 공식 「옵써버」를 파견하게 된 것이다.
NC통신원응로 동 「뉴·데리」 총회에 파견된 교회일치문제 전문가 신부는 이를 시대적 요구(要求)이라고 표현하였다. 시대적 요구인 바로 그것에 등한할 수 없다. 만일 우리 탓으로 이같은 시대성(時代性)을 띈 것을 일실(逸失)한다면 좀체로 만회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항상 선도(先導)의 영단을 내리는 「로오마」 성청은 이같이 프로테스탄트 기구(機構)에 중대한 관심을 보냄으로 큰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