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敎會曆)을 통해서 마치 영적(靈的)인 편답(遍踏)을 해오듯 또다시 우리는 장림절에 들어선 것이다. 영적인 편답이란 표현이 어찌 생각하면 순수한 신앙생활을 지침하는 것 같으나 그것이 곧 건젆나 교회 생활이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 생활에 있어 우리가 실질적으로 교회에 기여하고 또 당연한 그 일원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해야 할 중대한 것의 하나는 「교무금」에 관한 것이다.
교무금에 관한 한국 가톨릭지도서(指導書)의 서술을 그대로 소개하겠다.
『국가는 국민의 세납으로 유지되어 나가는 것처럼, 교회는 교우들의 교무금으로 유지되어 나간다. 교무금이란 말은 교회 유지를 위하여 의무적으로 헌금(獻金)한다는 뜻이다. 의무(義務)가 있는 만큼, 이 의무를 등한히하여 실행치 않으면 죄를 면치 못한다. 교구감목은 자기 교구 안에 이 의무를 고집하여 실행치 않는 자를 처벌할 수 있다.
교무금의 분량은 일률적으로 재정하기는 어렵다. 재산의 정도를 보아서 등급을 매는 수도 있고, 일반의 양심에 호소하여 더 좋은 성적을 거두는 수도 있으며, 일년에 한 번, 혹 두 번이나 네 번, 혹은 달마다 거두는 수도 있다. 이런 것은 각 지방의 그때그때의 형편을 보아서 회장들이나 위원들이 신중하게 결정할 것이다.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교무금 징수는 가정(살림)을 단위로 할 것이지, 개인(식구)를 단위로 할 것이 아니며, 더구나 성사받는 자를 추려내어, 이를 성사에 관련시킬 것은 아니다. 그리고 걸인에 가까운 극빈자와, 비가톨릭 가정에서 혼자 가톨릭에 나와 수계하는 여유 없는 교우들을 제외(除外)하는 아량은 있어야 한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교무금은 성사를 받고 안 받음에 아무 관계가 없다. 마치 냉담자라도 주일과 대소재를 지킬 의무는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성사 안받는 냉담자에게도 이 교무금을 바칠 의무는 그대로 계속되어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무금을 못 내었으니 성사를 받지 못하겠다든가, 성사를 받지 않으니 교무금도 내지 않겠다는 말은 도대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납(收納)된 교무금은 교회의 재산이요, 교회의 재산을 처리하는 권리는 감목에게 있은즉, 교무금의 처리와 용도 등에 대하여는 각기 교구감목의 지휘하시는대로 할 것이다. 본당신부는 감목의 보좌격인 만큼, 자기 본당에서는 어느 정도 감목의 대리이다. 그러므로 지방교회 재산처리에는 본당신부와 회장들이나 위원들이 합의하여 나갈 것이다. 만일 합의되지 않는 경우에는, 교구감목께 품달하여 그 처리하여 주심을 청할 수 있지만, 이렇게 하지도 않고 회장들이나 위원들이 본당신부를 반대하여 고집하지 못할 것이다』
교무금의 의무성(義務性)을 밝히는 동시에 그 중대성을 충분히 강조하고 있다. 그 요건(要件)도 충분히 나타나 있다. 전기 한국 가톨릭지도서(指導書)는 주교회의 인준(認准)을 거듭 받아온 중요한 법전(法典)과 같은 것이다.
교무금의 의무성(義務性), 거기 따르는 버적 강제력(强制力)에 선행(先行)할 것은 우리들의 정성이다. 우리가 좋은 가정을 영위하고 꾸며가려는 것은 거의 본능적으로 생각하는 터이다. 우아하고 고상한 환경을 만들고 문자 그대로 행복이 깃들만한 곳(가정)을 장만 하는 것은 그 너무나 당연한 욕구일 것이다. 우리의 신자적인 양심은 본당을 마치 제 집안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겠다. 우리 자신 및 우리의 자녀들은 가정과 본당을 참 생활의 근거(根據)가 되게 해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본당에 바치는 정성은 제 집안과 제몸을 돌봄과 하등 구분될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 신자들에게 이런 정성(=신앙)이 있기 때문에 오늘 볼 수 있는 교회(可見的敎會)는 날로 융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본래 구미인(歐美人)들은 의무감(義務感)에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들은 큰 본당을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폭넓은 교구 사업을 전적으로 부담하고 있다. 그 뿐 아니다. 해마다 방대한 예산으로 집행되는 전교지방 제비용을 또한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의 주일헌금은 구약의 십일조 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십일조 정신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즉 헌금은 자기 수입의 일부를 헌납하는 것으로 그만한 희생이 동반한다. 손끝으로 집어낼 수 있는 미미한 그것으로서는 희생이 동반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독사람들은 연방정부에 바치는 국세(國稅)의 일부로 종교세(宗敎稅)를 가산하고 있는데 종교세는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자진 등록(登錄)하게 마련이다. 종교세를 승락하는 그들의 의무에 대한 관념(觀念)을 본받을 만하다. 그들은 의무보다 더 숭고(崇高)한 정신은 없는줄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의무만이 위대한 이름이라고까지 찬양하고 있다. 이같은 의무의 정신이 곧 그들의 부흥정신인가 한다. 또 종교세의 자진 등록을 할 때 어느 소비면을 어떻게 절약하면 얼마를 헌납할 수 있겠다는 것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오늘의 십일조 정신이 아닐까.
우리는 저마다 제본당에 기여하는 정도에서나마 정성을 다해야 하겠다. 또한 강조할 것은 그것은 정성인 동시에 완전한 의무에 속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노예가 아니고 자유민이 된 그 감격을 되살린다면, 결단코 남의 도움을 바라지 않는 내 본당의 경제적 완전 독립과 그 번영을 위한 헌금의무에 인색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