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깐공의회 개최일까지 4개월 남지가다. 공의회 중앙준비위원회는 중요한 의제안(議題案)을 결정짓는데로 동 공보부를 통해 발표하고 있으며 한편 바티깐 방송은 거기 관련된 대담한 논평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모든 발표를 극히 제한하고 있으며 어느시기까지는 논의조차 신중을 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오는 10월 11일 그 막을 올리게 되는 공의회에는 전세계의 각종 전달기관(傳達機關)이 얼마나 동원될 것인가 하는데 큰 관심을 보낼만한 이유가 많은 줄 안다.
대체로 알려진 세계8천 일간신문에 발행부수 2억5천8백만부를 비롯해 2만2천의 정기간행물, 1만1천7백60 방송국, 1천 TV방송국, 17만본의 영화를 통하여 가히 전인류에 용이한 전달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통털어 매스콤이라 하거니와 현대는 이 놀랄만한 매스매디아(仲介)의 지배와 지배를 당하는 극히 유기적(有機的)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뉴스, 뉴스해설, 비판, 교리(敎理) 및 원칙(原則) 등의 정확한 보돌르 비롯하여 사진보도 영화, TV방송을 포함하는 다채로운 그것을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매스콤이 우리 생활에 차지하는 의의를 강조할 것도 없이 우리는 그것을 절실히 느기고 있다. 노상 대하는 신문 · 라디오 · 영화 등은 거의 우리의 눈 · 귀를 선도(先導)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문에 교회는 이 방면에 비싼 댓가를 치르면서까지 그 선용(善用)에 온갖 정력을 기울이고 있다.
오는 공의회에 대비(對備)할만한 우리의 매스콤 활동은 어느정도에서 가능하겠는가? 즉 어떻게 공의회에 관한 보도를 잘 전달할 수 있겠는가? 예상해볼 수 있는 일이다.
일간통신 등은 로마-서울 간에 수시간의 간격을 두고 수신(受信)될 수 있으므로 당일부로 기사화시켜갈 수 있다. 다만 문제되는 것은 한국서의 통신은 종교기사를 도외시하는 수가 많고 또 그 취급분량이 미미할 뿐 거기에 오역(誤譯)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점은 통신사측과 교회간의 상당한 사전타협이 있었으면 한다. 수년전 교황선거 때는 그때 한국가톨릭중앙협의회가 각 통신사와 관계접촉을 했었는데 통신사측의 많은 감사를 받은 일도 있다.
일간신문 등에 대해서도 공의회에 관한 많은 이해(理解)와 관심을 촉구해야 한다. 공의회가 실로 세기적인 과업인 것을 잘 인식한다면 그들 스스로 보도사명가을 느기고 자진해 올 일인 줄 안다.
로마에는 전세계 2천명이 넘는 가톨릭 주교 수도원장 초청받은 신학 · 교회법률가 등이 한자리에 모이고 이를 개기로 한 최대한의 가톨릭국제회합이 연속될 것을 미루어볼 때 각국 정부는 이 기간을 잘 포촉하여 가능한 외교활동을 하려고도 할 것이다. 가톨릭 국제회합은 가장 모범적인 소(小) 유엔회의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하물며 백년을 벌러서 개최하는 공의회의 국제성(國際性)을 누가 최대최선의 것으로 평가하기에 인색할 것인가.
공의회의 보도문제로 뒤돌아가서 둘째로 현지(現地) 보도에 관한 것을 생각해보자. 현지보도의 사명은 공식 성명을 취재하는 외에 극히 우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에 대하여 한국의 입장에서 혹은 그 이익(利益)을 위해서 세밀히 파고들어야 한다.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도 있다. 로마에는 우리 성직자, 신학생들이 있고 또한 한국에서 참석하는 주교들이 대동하는 수행원도 있겠으므로 그 직능을 겸임할 수 있겠다.
요컨데 공의회와 우리간에 보다 믿을만하고 권위있는 전달의 방도가 확립되어 알고자 하는 눈 · 귀의 욕구가 충족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누구의 무성의로 그간의 전달이 둔하거나 차단되었을 때 우리는 다시한번 우리의 선열지성인들은 수천리길을 도보로 왕래하면서 복음의 중개를 실현하고야 말았다.
오늘날은 어떤가? 손쉽게 불과 몇푼으로 교회 정기간행물을 구독하여 읽고 또 남에게 전할 수도 있다. 힘찬 노력이나 힘겨운 희생없이 촌분의 성의만으로 족한 것이다. 성의라기보담 조그만한 마음쓰기에 달렸다고 본다.
국내간행물들도 가능한 성의를 다하여 공의회 보도에 힘써야 한다. 여기에는 관계자들이 사전준비를 위한 회합을 가지고 할 수만 있으면 우리 주교들의 관련기사를 더 잘 보도하고 또 효과있는 앞날을 열어갈 수 있도록 마련되었으면 한다.
공의회 보도사명의 긴요성과 국내보도기능(機能)을 동원할 수 있는 방도를 수립하도록 촉구하는 동시에 독자들의 성원을 새삼 간청하였다.
교황 교서 「에꾸매니꿈 꼰칠리움」에도 언급되었음과 같이 우리의 주교들이 공의회에 참석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는 우리가 다같이 참석하는 거와 전혀 같은 것이다. 우리 각자가 정신적으로 공의회에 나갈 수 있는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은 보도활동에 기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