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정부는 농촌의 고리채정리, 농산물가격 유지, 그리고 영농(營農) 자금의 방출 등 과감한 농업진흥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고리채 정리와 영농자금의 방출 등은 혁명정부만이 감행할 수 있었던 큰 성과였었다.
이런 획기적인 농촌진흥정책은 우리인구의 절대다수를 점하는 농민에게는 직접으로 막대한 혜택과 또한 앞날의 생생발전(生生發展)할 수 있는 기회와 희망을 약속해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농촌문제가 일시에 해결되고 농민생활이 갑자기 뛰어오르듯 향상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바라는 것 조차 무모할 뿐이다.
오히려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면 많은 성과를 올리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이농(離農) 영세농화(零細農化) 및 소작제도의부활 등 정부의농업기본정책과도 상치되는 현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극히 상식적으로 살펴보더라도 농산물 가격은 타물가와 비겨 너무나 헐값인 것이다. 경제안정을 향유하고 있는 곳에서도 농촌경제의 파탄(破綻은 농산물가격의 현격한 저락에서 온다는 것을 주의깊게 경게하고 있는 터이다.
또한 공통된 견해는 우리의 농업이 조속히 근대화(近代化)되어야 하며 그같은 조속한 근대화를 성취하기에는 농업구조(農業構造)를 철저히 변경할 것이다. 농촌진흥을 위한 방대한 정부보조와 그밖의 조성(助成)정책 등은 좀 더 근본적인데 주목하고 그것이 곧 구조개선의 시책(施策)이 될 수 있어야 할 줄 안다.
우리 농업의 근대화는 곧 다른 문제에 직결(直決)되는 지상(至上)과제이다. 선진국농촌을 돌보고 이 고장의 농촌을 대할 때 혹은 그 사정에 어두운 도시인들에게 마치 고대(古代)와 현대가 혼존(混存)하는 것 같은 웃지못할 기막힌 우리농촌사정을 목격할 것이다.
농업근대화에 필요한 구조개선에 언급했다. 이 점을 교황 요안 23세께서 어떻게 말씀하시고 있는가? 그 몇군대를 인용해보겠다.
『이론적으로 농촌생활의구조가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세계 여러나라들 사이에 있는 거대한 차이는 그만두고라도 각 국가 내부의 농촌사정만 할지라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에 우리가 사람과 가족에 대한 인간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인 관념을 갖는다면 우리는 인간사회의 모습을 가지고 작용하는 기업체를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그 종업원 간의 관계와 그 구조는 정의의 규범과 위에 말한 정신에 합치되는 것이라야 하며 무엇보다도 가족적인 규모의 기업이 가장 좋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와같은 이상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우리는 환경이 허락하는 데까지 이것을 실현시키려는 최대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는데 반드시 주의해야 할 사실은 가족적 규모의 기업은 가족으로 하여금 사람다운 안락한 생활을 가능하게 하기에 충분한 수입을 보장해 주는 경제적 조건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농부들은 가장 현대적인 경작 방법의 지도를 받고 그들에게 빌표한 것은 여러 형태의 협동조합을 가지고 직업적으로 조직되어서 다만 행정 기구뿐만 아니라 정치 운동에까지 이르는 공민생활에 참여해야 할 일이다.』
이상은 사회회칙(社會回勅) 혹은 노동 · 농촌청년대회에서 많은 심포지움과 연구를 거듭해 왔던 바이다. 「마뗄 엩 마지스뜨라」는 곳에 따라서는 그곳 대주교의 훈령으로 산하 각급 학교에서 정식 학과목으로 교수하고 있는 곳도 있다.
우리는 태반의 인구를 농촌에 두고 그때문에 심각한 농촌문제에 봉착하고 있는 것이다.
농촌문제가 기술 · 생산구조하는 과학과 경제의 영역에만 국한한다고 할 수 있으랴. 회칙에 있음과 같이 「사람다운 생활」을 전제로 하는 생활과 인간의 문제를 다 포함하고 있다. 어느 우수한 정책의 추진만으로 하루 아침에 그 많은 것의 해결을 볼 수 없을 것은 겹친소리가 될 뿐이다.
우리는 곳곳에 본당과 그 속속 벽촌드리 공소를 수없이 가지고 있다. 그곳은 누룩과도 같이 기어코 부풀어 오르는 날이 올 것을 믿어마지 않는다.
우리는 이 방면에서도 「마뗄 엩 마지스뜨라」에서 얻은 주옥같은 원칙들을 구제척으로 살려갈 방도를 얻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