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아래 새 것은 없다지만 그것도 심오(深奧)한 진리를 두고 하는 말이고, 인간사(人間事)에는 묵은 것과 새 것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피하기 어려운 것인가 한다. 하나 어느 한계에서 묵은 것과 새 것을 갈라놓을 수 있을지 극히 미묘한 계산으로 따져야 할 일도 없지 않다. 대체로 해묵고 낡은 생각이라면, 고루한 전통주의에 보수(保守)의 허울만으로 실상은 전통 보수의 의젓한 계통도 못되는 한 고착관념(固着觀念)에서 한발도 옮기지 못하고 있는 그런 딱한 생각을 말한 것인 줄 안다.
그런데 보수니 수구(守舊)니 하는 고집을 좀 더 파헤쳐보면 자기를 새것에 맞추(適應)지 못한데서 오는 일종의 심리적인 반발일 수도 없지 않다. 이런 경우 전통을 찾는다는 것이 한낱 편법에 불과한 것을 지적할 수도 있다.
▲어느 본당에 대단한 활기가 감돌고 있다면 그것은 곧 젊고 유능한 인사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 크게 틀리지 않을상 싶다. 젊다는 것이 마치 미덕(美德)처럼 좋은 것이어야 한다. 어느 노상에서 파리해진 걸인이 그만 죽을 차비를 차리고 있었다. 어느새 행인들이 엉성히 둘러싸기 시작했다. 포켙에 두손을 파묻고 말끔히 서있는 신사도 보였다. 그때 한 대학생풍의 청년이 달려들더니, 거의 시체가 된 몸에 손을 대고 이마를 짚어주고 하는 것이었다. 그의 동행인지 한 명은 경찰에 연락을 취하는듯 했다. 그게 정녕 젊음의 발산인듯 아름답고 부럽게 보였다. ▲곧잘 정신연령을 말하는 수가 있다. 마음으로는 젊었다는 것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잘쓰는 말이다. 정신적으로 젊었다는 것이 과연 얼마만한 행동을 동반할지 알 수 없으나 막상 유리한 기회에 가서는 나이값을 찾을 뜻을 두기 일수다. 온고지신(溫故知新)도 그렇게 해석을 달고 ▲81세의 노교황님이 지난 공의회 때 현대에의 적용, 소위 ACCIORNAMENTO측의 어깨를 치켜준 것은 과연 세기의 사표(師表)이구나 하는 경탄을 모으기에 족했다. ▲『내 청춘을 즐겁게 해주시는 천주께 나가리로다』 미사 첫 머리에 읽는 경문구절이다.
새날은 일신(日新)의 감격을 주는 것이 있다. 밝아오는 새날 앞에 낡고 묵은 것이 모두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반사경도 말씀히 닦으며 새롭고자 하는 정성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