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안 23세가 소집하신 제2차 바티깐공의회는 종교를 초월한 세계사적 가치를 인정받는 가운데 지난 10월11일부터 12월8일까지 제1기 회의를 끝마쳤다.
이미 다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이번 공의회에서 만큼 가톨릭 대(對) 「프로테스탄트」 정책이 개방적인 일은 일찌기 없었다. 이것은 요안 23세의 하나의 커다란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영국의 「캔타베리」 대주교를 인견(引見)한 것을 비롯해서 작년 겨울 인도 「뉴델리」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회의』(WCC)에는 그것이 「프로테스탄트」의 모임인데도 불구하고 「옵서버」까지 파견하여 그의 개방정책을 만방에 알려주었다.
이것은 교회의 재통일을 취임 초부터 강조한 요안 23세의 실천력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표시였으며 이러한 포석(布石)이 주효(奏效)하여 서기초(西紀初)에 갈라져 나갔던 동방교회와 「프로테스탄트」 대표들이 「옵서버」로서 이번 공의회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제1차 바티깐 공의회에서도 「프로테스탄트」의 「옵서버」를 초청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형식적인 「제스처」라고 해서 그들은 참석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러한 세계적 움직임에 처음으로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측의 반응이 12월11일자 『대한일보』 종교란에 발표되었다.
『가까와지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라는 제목하에 신학박사 김재준(金在俊) 목사의 글을 읽고 필자는 잠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김박사의 논거를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하자면 『종교개혁가 마르틴.루터나 칼빈을 성인의 위에 올림으로써 교회의 통일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를 무조건 이단자(異端者)로 취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현 교황 요안 23세의 태도로 명백해지고 있다. 특기할 만한 사실로는 19세기 때의 영국 성공회 존.헨리.뉴먼 대주교의 등용을 들 수 있다. 영국의 문학자이고 시인이며 신학자인 그는 성공회에서의 확고한 자기 위치를 헌신짝 같이 내버리고 개종하였을 때 가톨릭에서도 그를 성직자로서 맞아들이는데 서슴치 않았다.
그는 뒤에 추기경까지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교회의 통합이며 올바른 신심에의 귀의로서 그 결과가 눈물겨우리만치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같이 「프로테스탄티즘」을 버리고 오는 자만을 받아들인다는 교황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재삼 강조하려는 것이다. 다만 루터나 칼빈같은 인물을 성인 위에 올려야 한다는 따위의 억지로써 모처럼 가까와지려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사이를 더욱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프로테스탄티즘」을 개혁교(改革敎)라고 자칭하고 나서는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원대로 따지자면 『항의자(抗議者)』 또는 이의(異議)를 내세우는 것에 그치지 않는 「프로테스탄트」가 어째서 개혁교라는 명사로 번역되는지 알 수가 없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이미 상식화 되어 있는 교황이라는 용어를 버리고 애써 일본 사전에 있는 『법왕(法王)』으로 종시일관 표기하였다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분이 의식적이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한국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를 『열교(裂敎)』라고는 했을지언정 『열교(劣敎)라고』 표기한 일은 없었다. 모 동방교회를 이교(離敎)라고는 하였지만 분열자(分裂者)라고 공공연하게 완죄(完罪)하지는 않았다.
필자의 지나친 속단일런지는 모르지만 「프로테스탄트」 각파의 이러한 아전인수 격이고 편리주의적인 용어의 남용과 자기류의 해석이 그들 자신의 통합조차 이루지 못하고 있는 최대의 원인일 것이다.
교황 요안 23세의 그리스도교 일치문제를 환영한다고 말한 김재준 박사의 태도를 우리는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그러나 문제는 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천가능성 여부에 있다.
「가톨리시즘」에 이의를 내세우고 갈라져나간 「프로테스탄트」끼리의 합동을 제창하고 움직이고 있는 운동을 벌써 오래전부터 있는 줄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까찌 어느 파와 어느 파가 통합되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도리어 날이 갈수록 분열을 거듭하고 분쟁이 그칠 사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스도교 통합에의 길은 성의와 노력의 열매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지 입버릇처럼 외우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바이다.
筆者 言論人
安喆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