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은 성신강림후 제4주일이었다. 그들이 주일날 아침을 택하여 포문(砲門)을 연 것은 단순히 하나의 전략(戰略)이었다고만 볼 수는 없다. 변경(邊境)을 수비(守備)하는 병사들이 무기를 두교 교회로 가는 시간이 그들에게 남침(南侵)의 호기회(好機會)였던 이상으로 신앙생활에 대한 그들의 적개심(敵愾心)이 반영된 소치(所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론상(理論上) 공산주의와 정면으로 충돌되는 것은 자본주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에 있어서 그들이 자본주의 이상으로 적대시(敵對視)하는 것은 가톨릭사상과 그위에 세워진 교회로 되어있다. 가톨릭은 결코 그들이 비난하는 자본주의자도 아니고 그 비호자(庇護者)도 아니다. 구령(救靈)하는 길인 가톨릭사상과 세상에서 잘사는 방법으로서 내세운 공산주의나 자본주의와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뵈는데 가톨릭은 공산주의를 인간의 파괴자(破壞者)라고 하여 선죄(宣罪)하였다. 그 이유는 공산주의가 가톨릭사상과 정면으로 충돌되는 유물사관(唯物史觀)을 바탕으로 삼아 신(神)과 신으로부터 받은 인간의 품위를 말살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근본적(根本的)인 충돌로 인하여 공산주의는 가톨릭을 적대시하고 갖은 박해(迫害)와 사술(詐術)로써 교회파괴를 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발밑에서 울려오는 침묵교회(沈默敎會)의 기구(祈求)는 그들을 당황케 하고 있다. 침묵교회와 지상(地上)교히 천상(天上)과 세상이 서로 통공(通功)하고 있음을 깨닫기에는 그들의 간악(奸惡)과 고집이 지나치면서도 그들은 유일한 강적(强敵)이 가톨릭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이남(以南)교회 침공(侵攻)의 실패는 12년간에 30만이 훨신 넘는 신자를 격증(激增)시켜 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총을 가져오게 한 많은 기구의 힘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특히 많은 순교자와 이북(以北) 침묵교회의 기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동시에 또한 어떻게 그 도움을 갚아야 할 것인가를 항상 생각하여야 한다. 물론 공산치하(治下)에서도 구령의 길은 있다. 보속하고 공을 세울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약한 인간에게는 위험(危險)이 크고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전교지방에서는 우선 전교의 위축(萎縮)이 올 것을 생각할 때 그러한 위험을 면하기 위한 기구생활과 함께 적절한 정치적 활동이 병행(倂行)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교회가 선죄(宣罪)한 것은 비단 공산주의 만이 아니다. 공산주의는 그 근본사상이 반(反) 교회적이라는 이유에서 전체적으로 선죄되었으나 자본주의 정책에 관하여도 부분적으로 선죄 또는 경고(警告)를 잊지 아니하였다.
바야흐로 우리사회에 선풍(旋風)을 일으키고 있는 산아제한(産兒制限)이니 가족계획이라는 미명하(美名下)에서 성행되는 타태(墮胎)수술 피임수술(避姙手術) 또는 피임약 복용 등은 반교회적인 면에 있어서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선죄된 것이다. 이러한 반도덕적 사상의 침입은 신앙면에서 볼 때에는 또 하나의 6·25 사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산아제한이 국민재건운동의 하나로서 전국에 계몽반이 파견되고 곳곳에 「포스터」를 부치고 의사들이 고객(顧客)을 기다리고 입법화(立法化)하자는 움직임까지 일어났으니 종교면에서 본 그들의 인간관(人間觀)과 가족관(家族觀)이 과연 공산주의의 그것과 어느정도 다른지 의심되는 바가 적지 아니하다.
교회는 신을 부정(不定)하거나 인간의 이성과 신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모든 사상과 정책을 배격할 분 아니라 정의에서 유리(遊離)된 모든 법치(法治)사상을 또한 배격한다. 이러한 사상과 그 사상에 터잡은 모든 정책은 직접, 간접으로 신앙생활을 저해(阻害)하고 전교활동을 저지(阻止)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근본적 대립을 일으키고 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과 계(警戒)는 철저하나 반교회적인 자본주의 정책과 정치사상에 대하여는 흔히 등한시(等閑視)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무서운 현상은 하루빨리 우리의 각성(覺醒)으로 시정(是正)되어야 할 것이오 그 방어(防禦)와 계몽에 모든 신자가 분발하여야 할것이다. 이 방어전(防禦戰)에서 실패하면 6·25의 공산군 격퇴(擊退)의 의의가 크게 상실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