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삼년간 숫적으로 본 한국의 전교실적은 중외에 자랑할 만하다. 그 상승은 가일층 박차를 가하고 있는 추세에 있다.
그 중 지성인 저명인사 그리고 개종자의 수효가 증가되고 있는 것은 일반전교 활동에도 큰 자극이 되고 있다.
이같은 전교의 황금기(黃金期)가 무슨 계절처럼 도래(到來)한 것은 아니겠으나 그러나 예상을 넘는듯한 좋은 성과를 보고 자긍(自긍)하고 있을 수만 없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언제 무슨 방법으로 오늘의 성과를 기대하고 준비했었던가 하는데서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전교태세(傳敎態勢)를 반성해 볼 만한 일인 줄 안다.
오늘 큰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것은 그 원인(遠因)으로 말하면 역사적 교회(歷史的 成은 可視的敎會)의 거룩한 표양(表樣=__)에 모든 공덕을 돌려야 마땅할 것이다. 가톨릭은 신앙만으로 사람이 구령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신앙만능(信仰萬能)을 큰 오류로 다스리고 있다.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은 교회분열의 원인을 장만했다. 『나의 형제들아 누 설혹 스스로 신앙이 있노라 할지라도 선행이 없으면 무엇이 유익되랴. 그 신앙이 저를 능히 구할 수 있으랴. 만일 선행이 없다면 그는 죽은 것이니라. 선행이 없는 그대의 신앙을 내게 보이라. 이에 나 선행으로써 나의 신앙을 그대에게 보이리라. 그대는 천주 하나이심을 믿으며 그 믿는바는 옳도다. 그러나 악신(惡神)도 또한 믿고(두려워) 떠느니라. 어리석은 인간아 선행 없는 신앙은 무익한 것을 깨달으려는가. … 이에 저의 신앙은 그 선행과 더불어 협력하였으며 선행으로 인하여 그 신앙이 완전케 되었다는 것은 그대가 현재 보는 바이니라… 그러면 너희는 사람이 의화(義化)됨이 다만 신앙으로 말미암아서만이 아니라 (또한) 선행으로 말미암아서임을 보는도다. 대저(大抵) 육신이 영혼 없이는 죽은 것과 같이 선행 없이는 신앙이 또한 죽은 것이니라.』 (야고버 2·14-26)
많은 설명보다 그 본뜻은 신앙과 선행의 관계를 말한 것이겠으나 이에 엄격한 가톨릭교회의 근본적 태도를 또한 잘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전교의 기본태세는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즉 전교에는 눙(能)이 없으나 그러나 기구와 보속과 희생을 동반한 사랑에 충실한 무명(無名)의 열심교우의 존재가 결코 무시될 수 없는 법이다.
만일 전교태세를 정함에 있어 외면과 구전(口傳)만을 앞장세우고 전교의 근본자세(姿勢)를 무시한다면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또 쌓아올린(__) 모든 좋은 유산(특히 聖德)을 전교에 동원하지 못하는 우(愚)를 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교는 단지 구변이나 기동력(機動力)이 능한자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일국의 외교(外交)도 어느 탁월한 외교수완에 맡길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난지 오래이다. 오늘 국제정치의 역동관계(力動關係)는 오직 그 국민의 국민적 역량이 곧 외교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마키아베리」적인 정치관은 외교관은 위신(威信)을 부리는 위선자라야만 했었다. 그것은 오늘같이 발달된 국제사회에서는 전혀 통용될 수 없는 시대착오의 잠꼬대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만의 일이라도 우리의 전교태세에 이런 허점(虛點)을 어느 개인에 의해 노정되는 일이 있다면 그의 수고와는 달리 크게 「마이너스」를 자초할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그 때문에 교회는 종교사회학 개종심리학을 비롯한 우수한 교육학 등을 빌려서 전교의 이론 및 실제를 신중히 다루고 있는 것이다. 저 풋내기 철학자들의 공상같이만 보이던 「유물론저거 변증법」 그 몇 가지 이론이 공산세계를 구축했고 최저 2억2천만 이상의 공산주의 신봉자를 불과 40년간에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한토막 연극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역사의 운명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전교태세에 대한 지나친 신중론(愼重論)을 들고나선 감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어세(語勢)의 소치로 돌려주기 바란다.
우리는 먼저 가장 활발한 전교활동이 전개되고 있는 곳에 최대의 경의를 표하며 거기 가능한 성원을 보내기에 주저치 않는다. 우리 50만 회중이 작년의 배가 되는 노력을 전교에 바치지 않는다면 작년의 수준을 유지할 수 없다는 계산으로 나가야 한다. 전교에 있어 배가(倍加)는 노력과 정세를 무시한 산수가 아닌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