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사(敎會史)를 말할 때 곧장 앞세우는 것은 서양선교사들이 이땅에 들어와서 전교하고 복음의 씨를 뿌리기 전에 우리 스스로 가서 배우고 손수 복음의 씨를 가져다 심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고장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라고 자랑 삼는다. 과연 우리의 기이(奇異)한 역사는 듣는 사람이 한결 같이 찬양하는 바 되고 있다. 이씨조선 5백년사에 이보다 더 싱싱하고 길이 남을 수 있는 사실을 또 어디서 찾을 수 있으랴 싶다. 길이 남을 뿐 아니라 찬연히 빛나서 마땅할 일이다. ▲왜·호(倭·胡)난리에 국민은 극도로 피로곤패한데다가 그들의 당쟁(黨爭)이란 것은 정치적 의미를 넘어 골수에 사뭇치는 동족상잔이었었다. 그것은 심리적인 고통을 주기에 충분했다. 국민은 문자 그대로 물심(物心) 양면으로 도탄에 빠졌었다. ▲이때에 북경으로부터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천주교 입문서(入門書)를 입수한 남인(南人) 학자들은 이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던 끝에 신봉할만한 진리를 찾게 되었다. 그중에는 홍길동전을 지은 저 유명한 국문학자 허균(許균)이 있고 광주(廣州)에 거주하던 남인학자 이익(李익)이 있으며 그의 제자 안정복(安鼎福)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등이 있다. 그들은 순전한 서양학(西洋學)으로 말하자면 학문적 대상으로 그러나 그렇게 열렬히 그 진수에 파고들어갔던 것이다. ▲이만한 사실을 내세울 수 있으니 이땅의 복음의 씨앗은 우리 손으로 장만했노라 할만도 하다. 그만큼 남의 존경을 받을만도 하다. 그런데 그것은 한갖 역사적 사실(事實)로 그쳐지지 않았다. ▲그 씨앗 그 보람으로 오늘날 50만 신자를 가진 한반도(韓半島) 전역을 3분한 3대주교구를 설정하고 다시 거기 소속되는 지방교구를 두는 교계제도를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로마 성청이 한국교회의 제반능력을 평가하고 교계제도를 실시할 수 있다는 판정을 내린 끝에 교황 칙령으로 이를 선포(宣布)하게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역사나 조상자랑이 좀 심한 편이다. 경주의 첨성대 자랑을 실컷 하다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흔한 현대적 천문대 하나 반듯한 것이 없고 고려자기가 어떠니 하면서 외국산 커피잔을 앞에 놓고 앉았다. 또 법적지위(法的地位) 운운하는 것도 유행어처럼 항용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어느 신생국 대통령이 말끝마다 우리 헌법적 공화국이라고 하더란 익살이 연상됨다. ▲어쨌든 우리는 조상의 보람으로 그리고 선인들의 수고로 오늘 한국 가톨릭교계설정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역사는 어떤 의미로서도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교구마다 가톨릭 악숀체제(體制)를 완성하고 사회 · 문화 · 교육 그리고 출판 · 언론 및 모든 현대적 영역에 조직적인 포교전선(布敎戰線)을 펴가면서 밖으로는 국제적인 연결을 잘 이어간다면 타골이 말한 아시아의 등불은 우리가 먼저 불밝힐 수 있을 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