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7년 천주의 계시가 우리 선현들 위에 내려진지 10년 만에, 최초의 자작 「히에라르키아」(敎階確立)가 평신도 권일신을 주교로 그밖에 여러 신도들을 신부로 삼고 열심한 성무 집행과 열렬한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 한국 성교회의 시작이었다.
그후 많은 순교의 선혈이 금수강산을 물들인 다음 「불란서외방전교회」의 주교를 모신 한국 대목교구가 설정된 것은 1831년이었고 다시 131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진정한 본당 「히에라르키아」를 가지고 다번에 3대주교구의 창설을 보게 되었다.
물론 그동안에도 1882년까지의 반세기 동안은 박해, 군란, 순교의 연쇄극을 되풀이했고 그후의 80년도 무풍지대만을 지난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순교자의 꽃들이여 피어나라』는 표어와 같이 이제 한국은 50여만명의 신도를 가진 대교회로 발전을 보게 되었다. 참으로 오늘의 신도로서 지난날의 교회사를 회고해 볼 때에 가슴에 벅찬 감개를 무엇으로도 표현할 길이 없다.
생각컨대 지난날의 주교 신부직은 그것이 사회적 지위긴 커녕 언제나 포박과 혹형과 효수의 대상이었고 지난늘의 신도들은 일용할 양식은 커녕 유랑 체포 죽음의 위협을 순식간도 잊지 못하면서 신앙을 찾아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79위의 복자를 위시하여 1만명이 엄을 순교자들 뿐만 아니라 그밖에 살아남은 사람들도 오직 신앙 때문에 고향과 가정과 생업을 잃고 노예에 가까운 생활을 해가면서 천주를 섬겼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오늘날 성직은 우리 사회에서 확고한 사회적 지위가 되었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배급을 타기 위하여 입교할 수도 있고 유학을 가기 위하여, 결혼을 하기 위하여, 감투를 쓰기 위하여, 출마를 하기 위하여 입교하는 동기가 될 수도 있을 지경이 되었다. 이 얼마나 격세지감이 있는 사실이 아니랴.
그러나 우리는 불행히도 이러한 발전에 현혹되고 낙관만 할 처지가 못된 것이 오늘의 하니국 교회의 형편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 교회는 오늘날 주교 · 신부 · 평신도가 80년 전과 같은 공감 · 동고 생사를 같이 할 단합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 교회는 오늘날 백년전과 같이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만한 신도수를 실제로 가지고 있는가?
성교회가 번져간 곳마다 순교자의 꽃이 안 핀 곳이 없다.
그러나 순교자의 꽃이 만발할 때에 주교 신부 평신도에 다 꼭같이 「삼구」(三仇)의 전쟁은 더 심하게 벌어졌고 삼구의 전쟁에서 패잔병도 적지 않았던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16세기의 종교분열은 그저 일어난 일이 아니었고 18세기의 자연신 신앙은 이유없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고 최근세에 구라파를 휩쓴 반성적 운동은 우리가 무심히 살펴볼 일이 아니고 오늘날 성교회 나라들의 도시 주민들 수계율이 20%가 됙 ㅣ힘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강건너의 화재처럼 바라볼 수가 없는 일이다.
50만 신도! 해방 후에 배가 넘은 엄청난 기적적 숫자! 그러나 그중에 수계자가 50%이면 진짜 신자는 25만으로 줄어들 것이며 머지않아 신자가 백만으로 불고 수계자가 25%이면 여전히 알짜교우는 25만!
그리고 우리나라 인구 증가에 비하여 교우의 증가율을 살펴본다면 실제로 는 것은 무엇이 는 것일까?
미사 참례보다도 소풍이 더 중한 교우들 정권이 바뀔적마다 자라 목아지처럼 들어갓다 나왔다 하는 교우들 신부 수녀가 마음에 안들어서 성사를 안보는 교우들 자지가 성당에 나와주는 것이 틀별한 자선사업이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는 교우들 이런 것 저런 것을 생각할 때에 나는 마음 한 구석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공포감 조차도 느껴진다.
너무나 감투 욕심이 많고, 너무나 파벌이 심하고 너무나 말썽이 많은 우리민족성이 있는 이상, 성교회 안엔들 원죄의 결과가 싹 가실 수는 없겠지마는 1700년대의 우리 교우들, 1800년대의 한국 대목구의 주교 신부 평신도들은 그대로 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통합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고 나는 본다.
새로운 본당 교구 설정을 마음껏 축하하는 동시에 우리는 다같이 1832년으로 되돌아가기를 맹세하자 (끝)
이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