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축들이 모여서 자기 본당 강론이 어떻고 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강론만은 우리 본당이 제일이야」 그런데 듣고 있던 다른 축들도 모두 그렇다고 수긍하고 시인하는 것이었다. 『첫째 주일마다 새롭고 풍부한 내용인데다가 같은 말씀을 반복하시지 않으니 꼭 정한 시간에 끝맺어 가게 마련이고… 좀 더 듣고싶은데서 그치는 매력 때문인지 다음 주일 강론이 기대려지기도 한다니까』 『그렇기도 하지만 강론은 거리의 설교와 달라서 음성 악센트 제스쳐 할 것 없이 위엄있게 들리고 보이는데서 더욱 큰 힘을 준 것이 아닐까?』 ▲젊은 축들인지라 무엄하게도 자기 본당의 강론을 들어 평하듯 말하고 있다. 그런대로 듣고 있자니 『우리 본당은 강론이 반(半)이면 반은 훈련을 겸했어』 『아니 훈련은?』 『그야 훈련을 받아서 마땅하지. 한 번 수의된 것을 어느 귓전으로 들었는지 그대로 실행들을 하지 않으니 몇 번이고 고쳐서 듣게 될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 일 때문에 길어서 20분간에 끝낼 강론이 평균 40분이야. 아 그 몇 사람 때문에 항상 그렇게 되는거야』 『몇 사람 때문이라! 그 생각해 볼 여지도 없지 않군』 ▲강론은 주일 미사 참례의 의무(義務)와 같이 또한 중대한 본분(本分)에 속한다. 아마 주일미사 다음에 지켜야 할 큰 본분은 강론을 듣는 일일 것이다. 우리가 정영 겸손된 마음으로 잠잠히 타이르는 강론 말씀을 새겨듣는다면 한 주일에도 몇 차례나 넘어가는 사사(邪思) 억견과 망념(妄念)을 불식하고 새로 가다듬어 천주께 대면(對面)해 갈 길을 얻을 수 있다. 강론을 통하지 않고서는 갈피를 못잡고 허둥지둥 할 수밖에 없다. 강론의 길이를 불평하지만. ▲길게 또 자세히 말해야 할 일이 없지 않다. 충분한 설명이 요구되는 일도 없지 않다. 중대하고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서도 듣는 사람이나 들으라는 식으로 간결히 말해버린다면 여러 층이 한 회중(會衆)이 된 곳에서는 적절하지 못하겠다. ▲허나 우리가 전통적으로 「강론」이라 부르는데는 역시 전통적으로 다른 연설·설교·혹은 강연하는 거와는 어감(語感)에서부터 구별되고, 듣는 자와는 호흡을 같이 하면서 가늘고 굵은 심금(心琴)을 울려왔던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