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급학교의 졸업기를 맞이했다. 학교 졸업은 적어도 일생에 한 단계를 지어 주는 만큼 졸업생, 학교 그리고 가정에서 비상한 관심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겠다. 먼저 졸업이라는 한 완성을 성취한데 족히 축복을 주고 받아야 할 일이다. 중고교생으로 말하면 졸업과 함께 가장 왕성한 정신 및 육체의 발육 도중에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어느 모로서나 매우 다른 곳에 들어서게 된다. 가령 중학생이 고교생이 되고 고교생이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든지 혹은 학교를 떠나 사회에 나서게 될 때 그 환경의 변화는 심히 급격한 것이 될 것이다. 이 점은 대학을 나와 사회로 진출하게 되는데 있어서도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인 줄 안다.
어떻든 공통된 것은 또 하나의 새롭고 잘 알지 못하는 환경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거기 붙이는 기대와 흥미를 담은 관심도 뒤섞여져서 막연한 희망이 솟기도 하고 그와 동시에 적지 않은 불안마저 없지 않으리라.
한 말로 환경이란 표현을 빌렀지만 실상 그 환경이란 설명한 것은 아니다. 한 테두리에 있는 듯이 보이는 한 학교 울타리 안에서도 각자의 환경은 그야말로 천태만별이다. 학우(學友) 사이라는 티없는 정이(征夷)로 한 교실 한 운동장 그리고 같은 교사의 지도를 받아왔겠지만 조용히 각자의 내면(內面)을 들여다 보면 그 안에는 도저히 한결같이 생각할 수 없는 각자의 미묘한 차이(差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환경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학교 교육은 이 환경 조성(助成)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과 지배를 받는다는데서 시작하여 모든 교육활동의 근본을 삼고 있다. 따라서 학생들은 재학 중 가장 좋은 환경 속에서 생활해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학교라는 환경 속에서 마치 적당한 온도와 수분 및 토양의 영양을 취하면서 성장한 식물과 같이 제 힘 보다 환경에 의존하면서 살아온 것이었다.
그러든 것이 졸업이란 출구(出口)를 나서게 될 것이니 어쩔 수 없이 그 좋은 환경을 벗어나야만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졸업은 대단한 불안을 주고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겠다. 그러나 그같은 불안을 능가하는 새 환경이 마련되이 더 한 층 폭넓은 태두리를 장만해주고 있다. 이것이 대체로 졸업을 임시해서 각자에 놓여진 상태(狀態)인 것이다. 이같은 졸업이라는 상황 아래서 졸업생들의 현명(賢明)과 현찰(賢察)을 요구하는 많은 교훈을 지나치게 듣게되는 줄 안다.
거기 덧붙여 졸업이란 지점(地点)에선 각자의 신앙을 자성(自省) 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졸업의 영예가 일정한 학교수업(修業)을 마친 뒤에 그 완성을 보장하는 것이라면 각자의 신앙은 과연 거기 따를 만한 성장을 보게 되었는가? 이때의 신앙은 오히려 신덕(信德)이라고 표현함이 적절하겠다.
「천주교요리문답」은 『신덕은=천주계시하사 성교회에 맡기신 모든 진리를 천주의 진실하심을 인하여 확실히 믿는 덕이니라』고 설명한다. 진실한 신(神)의 권위를 신앙하는 정도가 성 바오로 종도의 『너희에게 단언하노니 나의 전한 복음은 사람으로 조차 온 것이 아니니라 대저 나 이를 사람에게서 받거나 배운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았노라』(갈라타 1·11…12)고 하신 말씀을 상기할 정도에 있는지?
「요리문답」이 분명히 지적하듯 이 「확실히 믿는 덕」이 우리 안에 얼마나 성장했는지 살펴 볼만한 일이다. 그 전에 어느 철학교수가 저명한 철학자 신부를 찾아와서 어려운 질문을 했다. 그 신부는 대충 그 설명을 해주면서 그러나 그가 더 확실히 알려진 이 조그마한 책을 읽는 것이 유익하겠다고 하면서 「천주교요리문답」 한 권을 전했다고 한다.
졸업으로 또 하나의 환경을 맞이하고 혹은 전문지식을 배우게 되거나 그것을 습득하고 나서는 각자에 어떤 형태로서나 거기 알맞는 정도의 자신과 확신이 없으면 그만큼 그 졸업은 큰 의의를 가지지 못한다. 많은 축하나 찬사가 다일 졸업을 기회로해서 자기 신덕을 자성하고 그 기반 위에 소중한 인생을 설계해 가고자 한다면 환경의 불비와 개인 앞으로 닥치는 어떤 난관도 비웃을만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졸업 기념미사 등을 여행하고 이 점을 강조할만한 더 많은 행사가 마련되기를 비라 맞이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