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이만때였다. 길었다면 길었던 학창 생활도 이제 끝이 나는 것이었다. 일곱살 먹었을 때 효성유치원에 든 후 20년만에 드디어 나는 졸업장을 손에 쥐고 소위 최고학부의 문을 나왔다. 고마운 사람들의 고마운 축하의 말과 격려의 말들을 받았다. 나는 몹시 기뻤다. 지난날 고생이 많았던 만큼 그만큼 더 기뻤다. 너무 기뻐서 기쁜 줄도 모를만큼 그만큼 기뻤다. 아니 기뻤다기 보다는 차라리 흥겨웠다. 몹시 흥겨웠다. 수륙수만리 이국에서 혼자 당하는 기쁨이라 그만큼 더 흥분해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졸업장을 손에 쥐고 교문을 나와 하숙방으로 돌아가서 무엇보다 먼저 부모님께 편지를 쓴 기억이 난다. 조금 전 졸업식이 진행되고 있을 때는 모든 은인들 생각도 하였고 식이 끝나고는 지도교수께 인사도 갖곤히 하였다. 그러나 내 가슴 한 구석에는 누가 무어라고 해도 오늘의 영고아은 내 것이라는 자부심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나는 나의 고유(固有)한 이 영광을 1분이라도 빨리 고향에 계시는 양친께 알려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 후 두 주일이 되던 날 양친의 회답이 늦지 않고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 편지에는 일언반구의 축하의 말이 없었다. 다만 한 구절의 훈계의 말씀이 있었다. 『수년을 쌓은 형설(螢雪)의 공이 이제 이루어졌으니 성모께 감사하라』는 구절이었다. 나는 그 때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학업이 끝난 후 조금 있다가 나는 귀국하였다. 대구 근교에 있는 농촌에 와서 살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농민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동민 등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므로 외국인에 대한 지식은 별로 없다. 때마침 이 동내에 한 영국인 교사가 와서 살게 되었다. 동민들은 말을 몰라서 답답해 하였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이 외국인과 온갖 의사를 교환할 수가 있었다.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이 마을에도 한글을 읽을 줄 몰라서 답답해 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학교에 가서 배우지 못했기에 한글을 몰라서 답답해 하는 동내 사람들을 볼 때 나는 학교에서 국어를 배웠기 때문에 불편 없이 글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것을 성모께 한없이 감사하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해서 『형설의 공이 이루어졌으니 성모께 감사하라』는 말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이 구절을 명심(銘心)하고 있다. 뿐 아니라 금후의 나의 생애(生涯)에도 귀중한 교훈이 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과연 그렇다. 졸업의 영광은 나의 것이 아니고 학교에 갈 수 있는 기회와 두뇌와 건강과 모든 것을 부여한 자의 영광이다. 내가 한없이 성모께 감사할 때 나는 또 한 없이 성모께 그 은혜를 보답하고 싶어진다. 나는 모르는 사람을 가르치고 싶다.
몇 해 전 나의 학창생활은 끝이 났으나 나는 또 학창생활을 시작하여 왔다. 평소에 원하던 교원 노릇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만일 내가 교원의 한 사람으로서 교문을 떠나는 졸업생들에게 한 마디의 충언을 하는 것이 내게 허락된다면 나는 주저치 않고 이 말을 반복하리라 『형설의 공이 이루어 졌으니 성모께 감사하라』고.
李文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