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가 곡해(曲解)되고 오용(誤用)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소리가 작금에 생긴 일은 아니다. 잘못 쓰는 자유를 강력히 경고하고 그 자숙(自肅)을 강요한 것이 곧 지난 군정치의 일면이기도 했다. 이제 정치면에서 많은 자유를 본연의 자세(姿勢)로 만회시켜가는 도상에 있다. 모든 불합리한 정치제도를 다만 혁명질서(革命秩序) 아래 있다는 명분(名分)으로 유지해오던 것을 모두 헌법절차상의 요건을 구비시켜갈 차비를 마련해가게된 것이다. 그 첫 과업은 민주사회의 기본요소가 되는 정치활동의 골로 날아가게 되었다.
정치활동은 민주질서하의 중요한 자유의 행사(行使)인 것이다. 과연 자유가 인간에게 얼마나 유효(有效)한 것인가? 우리가 주목할 것은 자유의 행사로 인간 및 그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또 얼마나 발전시켜 갈 수 있느냐 하는 데 있다. 우리는 먼저 그같은 자유가 구령(救靈)에 이바지 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하고 또 그와 관련해서 국민적 복지생활에 적합한 것이 되기를 바란다. 교회는 이 사정을 생각하고 사회교의(社會敎義)를 통해 사회 및 정치상의 자유를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자유의 계념은 오직 인격에 근원을 둔다. 이 점은 인간정신에 자유의 원천을 구하는 자유세계의 일반계념과 전혀 일치하고 있다. 교회는 더욱 명백한 구체적인 정신 즉 영성적 영혼에 자유를 귀속시키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인간은 시간, 공간 및 물질에 억매여 그 테두리에서 자유를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영성적인 완전한 자유와 현실적인 불완전하나 자유를 동시에 향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성의 자유를 가진 인간은 제둘레 및 사회적 호나경과 나아가서는 역사까지도 잘 개선하고 조정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문명, 그리고 인류적 발전을 도모해 왔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한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인간의 능력은 자기들의 사회를 잘 다스리는 길을 부단히 발견해갔다. 이것이 곧 정치의 발전이었다. 이런 능력과 더불어 보다 큰 자유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는 이 사정을 생각하고 그 방면의 발전을 크게 장려해왔다. 교회가 인간의 지성은 물론, 학문·예술 및 과학의 발달을 뒤에서 밀어주고 있는 것은 그로조차 거두게 되는 보람 있는 자유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오 11세의 사회회칙(社會回勅)은 이 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조물주의 계획 안에 사회는 인간이 그 목표에 도달하는데 이용될 수 있고 또 이용되어야만 하는 자연적 기관이다. 사회는 인간을 위해 있고 그 반대(VICE VERSA)는 아니다. 이는 사회를 개인의 이기주의(利己主義)적 이용에 종속시키는 개인주의의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사회와 한 유기적(有機的) 일치 및 인간행복을 달성하는 상호협동의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無神的 共産主義에서)
이에 더 분명한 자유의 계념을 다른데서 읽어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유의 행사(行使)는 아(知)는 것이 아니라 선택에 있다. 그러나 행동으로 이 선택을 실천해 갈 때 많은 압력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그 어떤 압력에 저항해가는데 정치활동은 다채롭게 전개(展開)될 수 있다. 가령 그런 목적의 정치적 협동 및 조직에 대하여 교회가 전통적으로 많은 성원을 보내고 있음은 실례를 들어서라도 쉽게 방증(傍證)할 수 있겠다.
이 방면에 교회가 가르치는 교의(敎義)가 너무 이론적이요 따라서 난해한 것임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인가 한다.
우리는 한 때 각자의 신덕(信德)만을 철통같이 만들기 전념하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런 나머지 굳은 신앙을 밖으로 잘 선양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좀 더 폭넓게 사도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일실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만일 남과 조금도 뒤지지 않고 새 나라 건설의 대열에 서고자 할진대 항상 교회와 더불어 교회와 같이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어야 하겠다.
우리에는 이 방면의 것을 듣고 배울 길이 매우 부족했다. 우선 가톨릭 사회주간(社會週間)같은 계몽행사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가톨릭계 각급학교 학생회 등도 틈을 봐서 「세미나」같은 것을 열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신앙이 개인적으로 파괴될 수 없을만치 공고하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국가건설의 운명을 걸고있는 마당에 가톨릭적 사회관(社會觀) 및 그 사회정책이 큰 발언을 못하고 있는 것은 불민히 여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