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부활의 신비(神秘)가 모든 영적 생활과 모든 사도직과 모든 전례의 원동력(原動力)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혹시 우리는 이 원동력에서 아무런 「에네르기」를 펴내지 못하고 있지나 않는가. 여기 대한 반성이 사순절(四旬節) 문턱에 서 있는 이 때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먼저 부활제를 「빠스카」(지나심)로 부르는 의외의 중대성을 지적하는 바이다. 사순절과 성주간의 전례가 「빠스카」적인지 반성해보자. 먼저 질문이 좀 이상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사순절(四旬節)의 전례를 신자들에게 해설하는 순간부터 그것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빠스카」적 교훈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이 반성할 때 우리는 그것이 그렇듯이 명백하지 않음을 볼 것이다. 우리가 부활전야제(前夜祭)를 『光明의 祝日』로 묘사할 때 매우 잘 표현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의 중심에 있지 않다. 개정된 성주간 전례가 우리를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새롭게 하게 한다고 할 때 그들은 열심한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비적인 것보다 심리적인 의의 속에 신자들을 유도할 우려성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빠스카」의 신비를 제시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와 교회와 성사 안에서 동시에 제시해야 한다. 이는 마치 동심(同心)의 원(園)과 같아서 항상 보다 넓게 죽음과 생명과 천주의 업적이란 「빠스카」의 약도(略圖)에 순종한다. 사실 부활제는 먼저 교회인 당신 신비체의 으뜸되시고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지나심」이다. 그는 죽음에서 생활에로 암흑에서 광명으로 굴욕에서 광영으로 스스로 길을 개척하셨다. 그 다음에 그것은 천주의 선민(選民)의 「지나심」이다.
이 선민은 죄악의 애급땅을 떠나 홍해와 지상시련(地上試鍊)의 「파라오」로부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선민은 바위에서 물을 솟게하고 「만나」로 양육되어 모이서와 요수에와 사랑의 율법자요 자기 피로 맺은 신약의 사제요 자기 양들이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충실한 목자인 예수를 따라 복지를 향하여 나아간다. 마참내 「빠스카」의 신비는 천주의 선민인 우리가 스승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는 성사이다. 부활을 지낸다는 것은 다만 교회의 계명에 순종한다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봉인(封印)된 계약(契約)의 수령자(受領者)가 되는 것이다. 성세로써 처음으로 이 계약을 맺게하고 견진은 그를 비준(批准)하고 고해는 그를 부흥(復興)하고 성체는 그를 완성(完成)한다. 사용된 방법이 신자들을 거기 관통시키기 위해 우리가 원하는 목적에 참으로 적절할 때 이 모든 것은 매우 단순하고 매우 풍부하고 동시에 신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의 교리 문답책은 부활의 신비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물론 성삼(聖三)과 강생과 구속의 교리에 대하여 몇 마디 하고 있다.
부활에 대한 조목도 있다. 혹자는 부활에 참여하는 사상은 성사 편에서 볼 수 있다고 반박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매우 논리적이기는 하나 죽음과 부활의 신비의 논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이러한 결함이 전례와 성사와 윤리적 신자생활에 없어야 한다. 이러한 생활이 없기 때문에 신자생활은 과도한 「모랄리즘」으로 기울어진다.
셋째로 우리의 강론도 「빠스카」적인가? 오늘날 두 가지 경향을 볼 수 있다.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방법으로 예컨데 한 해는 「믿을교리」 다음 해는 「미사」 또 그 다음에는 「성사」 혹은 「윤리」에 대하여 강론한다.
또 다른 한 가지 방법은 그 날 그 날 신자답게 생각하고 사는 방법을 마련하고 특히 그 날의 서간과 복음에 기인한 전례(典禮)에 매우 가까운 교훈을 주는 강론이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어느 것이 더 「빠스카」의 정신에 가까운가 어느 것이 더 잘 우리 신자들에게 성주간을 준비시키는가. 그것은 후자인 것 같이 생각된다. 장림절에 성탄을 준비하고 사순절에 부활을 준비한다. 요는 신자생활에 「빠스카」적인 「다이나미즘」이 참으로 들어가는가를 알아야 한다. 이 모든 「다이나미즘」은 세말로 유지된다. 즉 죽음과 부활과 천주의 업적 등.
결론으로 우리는 사순절 성화(聖化)를 위한 실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에게 「빠스카」적 신앙의 교육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우리 마음 속에 좀 더 밀접하게 우리 생활 속에 좀 더 깊이 십자가의 「스칸달」과 부활의 승리를 관통케 하는 신앙의 교육이 필요하다. 그러한 준비가 되어 있는 정도에 따라 사순절 모든 전례에 불만을 품지 아니할 것이요 성주간 전례 특히 부활 전야의 전례가 길고 복잡하다고 생각지 아니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