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成人) 영세후보자의 영세예절을 집행함에 있어서 이를 한꺼번에 수여하지 않고 그 지방 주교는 영세예비자의 교리교육 정도에 알맞도록 7단계로 분할(分割)하여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가톨릭時報 제335호 聖廳 禮部聖省令 參照)
이것은 전례(典禮)의 깊은 뜻을 더욱 철저히 인식하고 거기 젖은 전례생활을 할 수 있게 유도해 가자는 교회의 의향에서 나온 것이다. 과거 수년간 전례의 많은 개혁이 있었다. 성주간 전례, 영성체전 공심재에 비롯하여 미사성제에 있어서 회중(會衆)이 더욱 행동적으로 전례에 분여(分與)할 수 있도록 과감한 개혁을 단행해왔었다.
이번에 영세예절을 7단계로 구분하여 분할적으로 그 예절을 집행하게 된 것은 앞에 지적한 제전례개혁과 동일한 비중의 중대성을 가졌다. 그때문에 그 본뜻을 익히 알아둘 일임을 강조한다.
성좌공보(聖座公報) 「악따 아뽀스똘리깨 세디스」에 의하면 전세계 주교들은 대인영세를 한곳에서 한꺼번에 수여하지 않고 분할예절을 장만해서 구분되고 분리된 7단계를 정할 수 있다.
각 단계간의 시일에 관해서는 7단계를 완전히 분별하든지 혹은 두단계나 그 이상의 단계들을 함께 집행할 수도 있으나 그 지방주교의 권한으로 마련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런 방법은 단순히 고대(古代)의 관례를 부활시킨 것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많은 전교지방 및 많은 사목경험에서 대인영세는 적어도 몇단계의 구별이 있는 것이 좋겠다는 소리가 있은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성청 예부성성(禮部聖省)은 그 효과를 두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 하나는 대인영세예절이 되기 때문에 실시해야만 하는 어려운 예절들을 더욱 용이하게 집행할 수 있고 둘째는 몇단계로 분할된 성사를 수여함으로 대인 영세이 존엄성을 갖출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대인영세예비자들을 위해 그들의 교리지식이 진보해가는데 따라 이같이 계단적으로 일련된 성사적 표적을 받게 된다는 것은 깊은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영성의 그늘에서 차차로 밝은 곳에 인도되는 신앙의 체험을 해갈 수 있다.
이렇게 더욱 깊은 뜻을 계몽시켜 주자는데 대의(大義)가 있는 만큼 모국어(母國語) 사용에도 상당한 주의가 있어야 한다. 모국어 사용은 최대한으로 허영된다고 했다. 가령 구마식(驅魔式=영세예절의 한단계)에 있어서도 라띤경문을 잃고난 뒤에는 모국어로 들려줌으로 그 본 뜻을 잘 알아듣게 해줘야 한다.
이런 점은 종전엔 매우 소홀했었다는 것을 솔직이 시인해야 한다. 서구라파에 있어서는 대인영세가 극히 드문일이지만 우리한국같은 전교지방에서는 그와 반대로 과거 5년간 영세입교한 25만명의 거의 대두분이 대인영세자였음을 생각해볼 때 이에 따르는 용의주도한 대비책이 있어야 할 줄 안다. 먼저 교회의 결정을 그 본뜻대로 알아들어야 하고 일반신자간의 상당한 계몽이 있어야 한다.
영세입교자가 많은 반면에 자기의 신앙을 흐지뷔하게 상실하거나 실천하고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의 수가 붓는다면 영세입교자가 많다는 사실이 크게 욕될수도 있겠다.
그렇게 되는 원인중의 하나는 영세 전후의 제반준비가 불철저한데 있음을 본다. 영세로서 초자연생명에 다시 탄생한 감격을 언제까지라도 재신(再新)해갈 굳건한 신앙의 터전은 영세 당시에 장만해야만 한다. 신앙 및 지성(或은 理解라고 할 수도 있다)을 부단히 추궁해가면서 초자연생명과 구속의 특은을 합당한 자세(姿勢)로 수여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세예절뿐 아니라 전례 전반에 걸친 많은 검토가 이번 공의회에서 논의될 것으로 생각된다. 전례의 형식이 변경되거나 활발한 전레운동을 일으키는 근본은 결국은 그 전례의 본뜻을 인식시키자는 것이다.
전례교육을 포함하는 각 전례운동의 긴요성은 이 땅에서 만큼 절실한 곳은 없다. 사실 가톨릭의 전례는 일반인의 호감을 사고 있다. 거기에는 우리 고유의 감정상으로만도 공감과 무언중에 이뜰려드는 매력을 느끼게 해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극히 피상적인 면에서도 전례는 그만한 값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한다.
이번 영세예절의 대폭적인 변경으로 각 본당마다의 많은 예비자 교리반 운영방식 또한 필요한 개선을 보게될 것이다. 이에 부수되는 모든 변경은 모두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더욱 효과적인 것이 되기를 기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