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지성인(知性人)이라면 그 개념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나 학문 및 문화, 예술을 비롯한 사회적으로 널리 영향을 미치는 소위 문화관계종사자(從事者)라는 일반 관념을 빌린다면 반드시 막연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먼저 가톨릭 지성인의 정의(定義)를 달고 그들의 상황에 논급해 보고자 한다.
아직 확실한 수를 잡지는 못했으나 전국 각 대학에 아마 백명 이상의 가톨릭 교수(傳任講師)가 있고 그 중에는 거의 한국적 존재가 된 분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학내에서 가톨릭교수인 것을 선명히 드러내고 있어 일반이 그와 교회를 항상 연결시켜서 보고 있는 터다. 그 다음으로 비록 숫적으로는 대단치 않으나 문단(文壇)에나 선 분들에 주목할 만하다. 한국에서의 문단은 그 존립(存立)이 외국의 그 어느 「써클」보다 훨씬 폭넓고 또 확립되어 있다. 따라서 그 영향력은 거의 전국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문단에 나선 분들이 또한 그 분들의 활동을 통해 가톨릭의 기치(旗幟)를 들고 참 고군분투(孤軍奮鬪) 하듯 서로 격려하고 있음을 볼 때 저 역사철학자 니코라이.베르쟈에프가 말하는 무형(無形)의 교회를 음미(吟味)케 해주는 것이 있다. 가령 그 분들의 소설·시·평론 그밖에 작품활동에 있어서 이 땅에서 소화(消化)되기에는 아직도 요원한 「모랄」이 어떤 암시적(暗示的) 방법으로서라도 제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모랄」 내지·문화적 전통을 집어서 설명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언론·영화 및 방송 그리고 예술 부문에 있어서도 그곳의 관건을 쥐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다.
교회가 그 선용(善用)에 착안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요 이제와서는 상당한 경험을 장만한 위에 그 방면의 발전을 촉진할만한 국제적인 기구(機構)도 완성되어 가고 있다. 2차 바티깐공의회 첫 회기에서는 이 문제를 한 의제(議題)로 상정했었고, 주교들이 마치 사목(司牧)의 일부로 그 일을 수행해야 하도록 의결(議決)을 보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앞으로는 교회가 신문을 내고 방송국을 경영하며 대중에 대중적으로 전달(傳達)되는 기관에 직접 손대는 일이 결코 하나의 시도(試圖)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하는 중요한 사업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한가닥 취미를 만족시키는 정도의 막연하고 산만한 태도는 임할 수 없는 너무나 엄숙한 세기적(世紀的)인 공의회의 결정을 보게된 것이 곧 이 사업인 것이다. 필요한 장소에 교회 건물을 세우는 것과 같이 이 문화사업을 구체적으로 경영해 가야 한다.
그러나 이런 문화부문에는 고도의 지식과 기술뿐 아니라 이곳 풍토(風土)에서 쌓은 많은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얼마전 이웃나라를 다녀온 문인 한 분이 『그곳서는 문화인이 명사(名士) 대우를 받더라』고 한 말을 신문에서 읽었다. 명사의 대우란 어떤 것인지? 분명 이 땅서는 그렇지 못한 것을 잘 말해준 표현인가 한다. 이러한 통념(通念)이 교회 안에서도 감돌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현대적 지향과는 매우 어긋난 것으로 비난받아야 할 일이다. 그 전에 아버지가 애써 재산을 모아두면 근면한 자식은 상속받은 것을 늘이기에 흙속에 파묻히듯 살아가지만 문학을 합내하고 가사를 돌보지 않는 자식이 나오면 그를 탕아로 내몰았다. 그같은 생각으로 오늘 문화종사자를 대한다면 큰 시대 착오이겠다.
그들에게 비록 현실과 잘 조화할 줄 모르는 어둔한 면은 있을지라도 오직 참되고 오른 것에 순절을 지키고자 하는 자기 학문 예술에의 곡학아세(曲學阿世) 하지 않는 발걸음만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성 암브로시오께서는 학자는 교회와 민중이 소중히 길러낸 금조(金鳥)와 같으니 그는 교회의 영광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금조가 되고 영광 받기를 오히려 페리같이 여기는 오늘의 진실한 문화인이야말로 성 암브로시오의 치하(致賀)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가톨릭 지성인들이 본당에서나 교회 당국으로부터 좋은 대우받기를 바란다면 이 또한 큰 착각이라고 하겠으니 현대의 지성인 사도직의 이상을 체득치 못한 미숙한 소위로 돌릴 수밖에 없다.
괴테의 말처럼 최선(最善)은 말로 표현 못하는 법이다. 가톨릭 지성인들은 제 분야(分野)에서 무언중(無言中)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음을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들의 단합 및 확실한 조직과 그들을 사목구(司牧區)로 하는 지도신부의 출현이 긴급함을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