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학생운동에 대한 두갈래의 근본적인 상이(相異)는 아직 극복하지 못한듯 하다. 그 하나는 강력한 단일조직의 일본(一本)체제를 완성하자는 것이다. 이리저리 흩어져서 산만한 활동을 하고 산발적으로 무슨 행동을 일으킨다 해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없겠으며 학생대열에서 벗어나 낙오하는 자만 더 많이 나게 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학생지도의 중대성에 감하여 보다 실질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서 적은 그룹을 다수 조직해서 미록 전학생을 망라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좀더 완전한 길을 택하자는 것이 있다고 한다.
두 갈래의 근본적인 상이(相異)라고 했으나 실은 가톨릭학생운동의 방법만의 중대한 이견(異見)이란 뜻으로 간주할 수 있다.
오히려 근본문제는 가톨릭학생운동 자체에 달려 있는 줄 안다. 가톨릭학생들이 귀중한 시간과 노력을 지불해가면서 무엇을 어떻게 일(運動)하는가 하는데 달려있는 줄 안다.
가톨릭 학생운동에 대한 대단히 피상적이고 소극적인 인식을 무형간에서나 교육자 학생들 사이에서 엿들을 수 있다. 학생들이 활발한 성장과정에 있고 학교생활의 많은 부담으로 신자로서의 제 본분을 망각하기 쉬우니 그들을 모아서 교리도 가르쳐 주고 신심생활도 영위하게 해주는 것이 곧 어느 본당 어느대학의 가톨릭학생회가 아니겠는가 하는 심히 불철저한 관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정도의 인식만도 상당히 사려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할 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이같이 피상적이요 소극적인 가톨릭 학생운동에 대한 관념은 인식부족에서 오는 많은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가령 가톨릭 학생운동의 이름으로 좋은 「프로젝트」를 실행하려 할 때 그것은 방관하거나 학생으로 지나친듯이 여긴다면 필경 그 학생운동에 대한 인식이 충분치 못한 탓으로 가령 학생운동의 일부로 무슨 강의 강연을 요청받았을 때 한 수양담(修養談) 같은 것을 늘어놓아 학생들의 귀중한 시가을 앗아가는 수가 있다. 자기의 말재주나 교수경험을 빙자로 마지못해 수락한 시간땜 하는 것이 자기가 맡은 교실에서 있을 수 없는 그런 무엄한 태도를 취하는 수가 있다. 이런 것은 뜻있는 학생들의 분개를 자아내고 있다.
이런 일이 모두 가톨릭 학생운동에 대한 못마땅한 인식에서 저지르는 범과인 것이다.
그러면 진정한 가톨릭 학생운동의 그 자체는 무엇인가?
그것을 몇마디로 표현할 길은 없으나 적어도 우리사회에 있어서는 학생들에 의한 적극적이요 과감한 가토리시즘의 행동화(行動化)인 것이다. 그 때문에 학생들은 주위 환경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어떤 번역된 이치만으로서는 이 고장에서 힘있는 발언이 될 수 없다. 학생들이 가토리시즘을 듣고 나서서 자기성화에 의한 표양과 주옥같은 논리로 어느 반신적(反神的)이요 반인간적(反人間的)인 제세력과 맞설때 오직 적극과 감할 줄 알아야만 가톨릭학생운동이라 이름지을 수 있지 않겠는가?
지난 7월말 서울에서는 전국 가톨릭 학생회의 대의원 대회가 있었다. 대의원으로 선출된 학생들은 자기 단체를 대표해서 그자리에 나갔었던 것인만큼 동 대회는 전국가톨릭 학생들의 앞날을 좌우할 만한 그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회의 내용이나 규모를 볼 때 그것은 어느 다른나라의 것과 결코 손색이 없다. 또한 현하 사회정의 및 당면한 실제론 같은 것을 취급한 것은 대서특필할만한 가치가 있는 줄 안다.
앞에서부터 우리는 가톨릭학생운동에 꼭 한가지만 지적하고 강조한 셈이다. 그것은 보다 적극적이요 행동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적극성을 띠지 못하고 행동을 동반하지 못할 때 그것은 죽은 신앙이며 운동의 이름을 달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학생자체에 요구하는 동시에 일반신자들과 지도층에 호소한다. 특별히 교수, 지성인 및 문화인들은 자기들이 학생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추대되고 있다는 음성적 태도를 버리고 몸으로서 가톨릭학생운동에 가감해야만 한다. 교수 지성인 및 문화인들의 참여와 일반신자들의 성원은 기어이 가톨릭학생운동을 질과 양을 구비한 싱싱한 생명체가 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