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및 군사지도자들의 국민 앞에 행한 새 정치적 국면을 약속하는 엄숙한 2·27선서(宣誓)가 있은 후, 특별히 정당들의 조직공작 등 자못 활발한 새 사태를 발전시켜가고 있는 것같이 발전을 주목하는 연고는, 지금은 과거 지사를 대국적인 견지에서 말장 불문에 붙이고 또한 불민한 지난날이 되풀이 되지도 말아야 한다는 지극히 과민한 조심에서 비롯한 것인가 한다. 불민한 과거란, 곧 우리 정치인들의 체질(體質)이 되___한 당제(當_) 편파심(偏波心)인 것이다. 요즘 흔이 말하는 체질개선(改善) 운운하는 것은 길게 말할 것 없이 탐욕(貪慾)에 찬 정권쟁탈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옹졸한 싸움을 지양하자는 것인줄 안다. 우리가 곧잘 반성하는 저 사색당파(四色黨派)는 쉽게 말하면 현세적 부귀영화를 지상(至上)의 행복으로 믿는 정권 철학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승(勝)하면 정인(正人)이요 패하면 역적으로 모는 정치적 부패의 표본적인 보복사상인 것이다.
만일 이번 선서와 체질개선의 구호(口號)가 바로 이것을 말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그 동기를 극구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를 보증할만한 얼마만한 사상적이고 정신적인 바탕과 그 선도책(先導策)이 서 있느냐는데 마음씀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외면상(外面上)으로서이나마 당쟁의 지양(止揚)과 체질의 개선을 부르짖는 정신적 전환기(轉換期)를 맞이하고 있다면 현실의 과장된 표현일까? 허나 우리가 선도(先導)할 일은 그 방면에 무언중 그러나 행동 및 실천궁행으로써 자기 희생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일이겠다.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현실 정치에 직접 관여하기를 극력 피하며 그런 사례(事例)에는 엄중한 단속과 경고를 발하고 있다. 그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특히 공식장소에서 정치에 언급하거나 비록 사담으로서라도 교회 울 안에서 그런 것을 비친다면 좋은 표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 명기했음과 같이 어디까지나 정치의 실제 및 사례에 대한 불간섭원칙임을 명심하고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 교회는 인류의 참 교사(敎師)로서 정치·경제·문화 및 사회전반에 옳은 방향을 부단히 제시할 중대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 이 때에 교회의 발언은 항상 원리원칙에 입각한 간접적(間接的)인 기본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 관계를 혼돈한데서 정치와 관련된 일에 잘못 처신하는 수가 없지 않았다. 이것을 지적해 반성할 바로 그 시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안으로라고 한 것은 크게는 교회생활을 말할 수 있고 좁혀서는 각자의 내면(內面)을 다 포함한 뜻을 취할만하다. 우리는 항상 교회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동시에 자기 안에서 교회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바꿔서 말하면 교회와 같이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을 때 교회의 영속성(永續性)을 체득(體得)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이 길로서만 가톨릭의 본뜻을 제몸에다가 새길 수 있고 참 신자가 될 수 있는 줄 안다.
지금 한국 성교회는 성당 안이 좁고 신학교의 문이 통과하기 어려운 관문(關問)이 되다싶이 융성발전해가고 있다. 이것은 늘 자랑하고 있는터요. 남이 인정해주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 융성발전이 저 버섯처럼 허술히 피어난 것이 아니라, 과연 공고한 기반과 건전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 우선 우리 각자에게 그 眞否(진부)를 다짐해 볼 일이다.
마음으로 정한 가톨릭신자가 아니라 머리로, 사상으로 그리고 고백할 수 있는 신앙으로 전인간(全人間)에 새겨진 가톨릭인인가 하는 것을 자문(自問)해가야 한다. 우리는 한국 가톨릭의 성장(成長)을 재촉하거나 거기 박차를 가하기보다 오히려 갑자기 큰 살림을 차린 사람처럼 가다듬고 꾸밀 일이 너무나 많다. 쓸고 닦으며 갈고 빛낸 일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지금 그 시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밖에서 우리 자신을 냉정히 관찰해 볼 줄 알아야하고 세평(世評)에 귀 기울일줄도 알아야 한다. 말만 늘어놓고 들을줄 모르는 불구(不具)의 소위는 없었는가? 오직 냉혹한 반성을 할 때가 바야흐로 사순절과 같이 도래한 것이다.
참 우리의 정치풍토(風土)가 바뀔만한 전환기가 올 것인가 하는 것을 기대하기 전에 우리가 만일 간택된 자의 큰 자부심을 가지고 참(가짜가 아닌) 신자가 된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가는 곳마다 혁명의 불을 지를 수 있을만큼 그곳의 면목을 바꿔치기(置換)해 놓을 수 있겠다. 이씨조선 사색당쟁 속에 피흘려 가꾼 한국 가톨릭의 장한 전통이 이제 그 본면목을 드러낼 때가 오고야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