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학생들의 사도직 활동이 뚜렷해지고 자못 활발한 것은 지면상으로 읽는 바와 같다. 그들은 제반 난관을 무릅쓰고 금년에도 전국 가톨릭학생대의원대회까지 무난히 수행할 수 있었다.
이와는 달리 가톨릭 지식인 내지 지도자급의 그것은 날로 약화되고 있는 듯 하다. 어느 그런 조직의 이름도 듣기 어려운 판국에 있다. 새것은 고사하고 과거 활발했었던 것도 그 자태를 감추다싶이 하고 있는데, 그 워인과 탈이 어디 있는지 궁금하다.
가톨릭 지성인, 문화인들이 동원되어 호교(護敎)와 선교의 사도직 전선(戰線)을 펴고 사회적으로 전진할 필요성이 오늘같이 긴급한 때는 일찌기 없었다.
그 필요성을 적기하면 첫째 통계숫자가 명시하듯(本報 2面 參照) 한국 가톨릭은 전교의 일대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렇게 조성된 황금기가 언제까지 계속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현재 한국에서의 가토리시즘은 그만한 존경을 받고 있지만, 그 반동으로 언젠가 한번은 뜻하지 않는 침체(沈滯)의 시기가 올 수도 있다. 이것은 단지 인간의 상정(常情)인 동시에 정치, 경제 문화 및 사회적인 이유도 뒤따르는 수가 있다.
둘째 교회는 지성인, 문화인 등 지도급의 힘을 동원할 필요에 직면하고 있다.
그 연고는 지성인들의 적극적인 사도직 활동이 있어야 급히 성장하는 균형을 잡을 수 있다. 한편 이 점은 심리적으로도 매우 중대하다. 교회안에서 지식인들의 일거일동작은 무언중(無言中) 일반에 큰 영향을 끼쳐준다. 가령 조그만한 냉담한 몸가짐을 보일 때 필경은 그것이 커져서는 신앙은 무기력한 노유부녀자의 전용인가 하는 위험사상을 불붙일 수 있다.
셋째 가톨릭 지성인 문화인들은 사회관계에 있어서 이 땅에 가토리시즘의 위치(位置)를 결정할만한 중책을 걸머지고 있다. 실상 자기의 사회적 지위 학문 및 명성을 통해서 그분야(分野)에서의 소신(所信)의 자기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평신도 사도직의 본령을 수행하는 것이 된다.
넷째 오늘같이 국제 사회의 상호연환(相互連環) 관계가 긴밀히 발달된 때는 일찌기 없었다. 어떤 일에서도 고립상태에 있어서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으며 어떤 의미로서는 고립을 허용하지 않는다. 가톨릭 제단체는 반드시 국제적으로 연결하여 그것을 큰 목표로 삼아왔었다.
그 종별과 범위는 실로 방대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최근 유네스코에 정식으로 가입되는 비정부(非政府) 단체의 수가 증가되고 있으나 그 대부분은 가톨릭단체인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가톨릭국제단체들이 한국과 같은 발전도상에 있는 고장에 대해서는 물심양면의 협조를 표방하고 있다. 돈과 사람과 기술을 동원해서 저쪽에서 손잡겠다고 하는 형편이다. 이 사정은 어느 기회에 동종의 국제회의에 나가본 적이 있는 분이면 곧 인증할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맘의 도움을 청하고 받아 들이는데서도 그 태세(態勢)를 세우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어느 단체인 것을 지적하지 않거니와 지식인들의 규합일수록 조직력이 약하고 또 항구하지 못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말았다. 비록 그 탓이 외부적인 불가피한데 있었다 하더라도 가톨릭 악숀의 숭고한 사명감에서 볼 때 내세울만한 이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탓은 낡은 수법 및 고루한 사고방식 그리고 얼치기 선입견 등을 불식하지 못한채 가톨릭 악숀에 나선 대문이 아닐까 한다.
앞에 지적한 지성인들에 의한 사도직 활동의 필요성이 더욱 활발히 논의되고 강조되기 바란다. 학생들이 재학중 가톨릭 악숀을 배우고 실천하고 하지만 오늘 형편은 졸업과 동시에 그것도 졸업해야 할 판이다.
학생들의 가톨릭 악숀이 일시적이요 임시적인 것이 되지 않고 오랜 훈련과 경험을 잘 이어서 살려가게 하기 위해서도 지식인들의 직업별 사도직 조직이 서둘러서 조직되어야 한다.
지금 볓곳의 가톨릭의사회(醫師會)는 모범적인 발전을 해가고 있다. 이를 모델삼아 악숀조직을 해갈 수 있지 않을까.
선행(先行)할 일은 지성인, 문화인 등 지도층에 있는 신자들의 새 자각이다. 그들이 만일 사도직 전선(前線)에서 후퇴한다면 저 십자군(十字軍) 전쟁때 어린 소년들을 앞장세우던 현대의 우(愚)를 재현하고 말 것이다 지성인들의 안일한 현실도피와 냉담한 태도 및 위선적 겸손은 곧 지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