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제2차 바티깐 공의회를 교회 재일치(再一致) 공의회라고 한다. 그러나 분리되고 분립된 각 그리스도교회를 재일치시키는 일만이 이번 공의회의 목표는 아니다. 공의회의 제1목표는 가톨릭신앙의 재신(再新)에 있지만, 교회재일치를 도모하는 노력은 그다음 가는 큰 뜻을 가지고 있다.
교회재일치의 세기적인 위대한 과제(課題)에 일반은 어느정도의 관심과 성의를 가졌는지. 솔직이 보면 무관심과 회의까지 섞인 냉담한 태도와 및 부지없는 반의(反意)조차 없지 않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는 우리만의 실정은 아니다.
교회재일치를 표방하는 대의(大意)는 어디있는가? 제2차 바티깐공의회 그리스도교일치관계의 책임을 맡고 있는 베아 추기경의 소론(所論)에서 살펴보자.
제1의(義)는 그리스도교도의 사회간의 가능한 협동을 발견하는데 있다. 자연법(自然法) 및 가족생활, 교육, 공공(公共) 및 국제국가에 관련된 그리스도교 전통의 근본원리를 추진하는 논의와 행동으로 서로 협동해가야 한다.
제2의(義)는 신학의 진보 특별히 교리 성서 및 교리사(敎理史) 분야에 있어 학문적인 상이(相異)에 있어서의 협동을 추궁한다.
끝으로 진리에 충실하며 모든 학문적 분야에 열성을 가지고 봉사함으로 그리스도교도 단체가 이 신성한 봉사에 합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상 3개 원칙은 프로테스탄트의 각 교파간의 찬성과 환영을 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증좌로서는 영국 성공회를 필두로 루터교 감리교 그밖의 다른 교회연합조직에서 속속이 공의회 참석을 발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과(成果)만으로서도 오는 공의회는 세기적인 재일치의 공의회가 될 것은 분명하다.
앞에 말한 베아 추기경의 교회일치의 3원칙은 몇가지 당면한 근본적 생각을 지적한 것일 것이다. 정확한 의므로 교회 일치의 원칙은 아니다. 교회일치운동의 의의(意義)를 설명했을 뿐인 것이다. 여기서 교회일치의 본질적인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엄정한 의미의 종교적 사항에 속하며 근래 성행되는 신학대화(對話)에 맡겨야 할 일이다. 가령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세례(洗禮) 혼배 등을 어느 한계에서 인증하느냐 하는 거와 같은 사항은 극히 근본적인 문제에 속할 것이다. 그때문에 이같은 엄정한 의미의 종교적 사항과는 별도로 교회재일치 운동의 범위를 설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범위는 앞에 논급한 베아 추기경의 3개 원칙에 잘 표현되었다.
첫째 그리스도교적, 근본원리를 국가, 사회, 문화 교육 및 가족생활에 작용시켜가는데 있어서의 협동은 현실적으로 긴급하며 또한 무한히 가능한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교적 질서(秩序)는 공산질서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을뿐 아니라 세속주의적인 제세력에 의해서도 부단한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데 공동노력을 기울여야 할 일은 너무나 많은 것이다. 둘째 섯째의 분야도 공동의 활동을 객관적으로 강요당하다 싶이 필요에 직면했다고 할 수 있다.
베아 추기경이 늘 강조하고 있음과 같이 최대의 원리는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형제간에 사랑이 없고 반목(反目)만이 있다면 이는 사탄(敵)이 노리는 바요, 그 장단에 춤추는 거와 같다. 교회 재일치 운동은 곧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증진시키고 무용한 반목을 제거하자는 시대적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요안 23세 성하의 교회재일치의 높은 뜻이 전해졌을 때 이를 가장 열렬히 환영하고 실천한 것은 구라파의 저명한 대학들이었다. 학원의 자유는 오래전부터 종파를 넘어선 공동노력을 해왔었지만, 로마성좌의 소리는 그들을 고무하기에 충분했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에 의한 각종 친선행사를 열고 이런 결속의 실현으로서만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실(實)을 얻을 수 있음을 과시하고 있다. 이는 공산측에 또하나의 큰 위협이 되는 자유진영이 단결이기도 한 것이다.
이같이 교회 재일치 운동이 지도자 학자 및 대학에서 먼저 일어났다는데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즉 민중운동 같이 조급한 실현을 기대하기 어렵다 할지라도 공고한 토대 위에 설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인 움직임은 반드시 민중의 호응이 있어야 하느니만큼 교회재일치 운동은 모든 그리스찬에 부과된 큰 사명이라는 자각이 있어야 한다. 먼저 교회재일치의 이상(理想)을 트득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