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 설혹 스스로 신앙이 있노라 할지라도 선행이 없으면 무엇이 유익되랴. 그 신앙이 저를 능히 구원할 수 있으랴』(야고버 2.14)
가톨릭신앙의 개성(個性)을 가장 힘있게 표현한 구절인 줄 안다. 우리는 또한 지행일치(知行一致)란 말을 곧잘 들어왔었다.
영국의 유명한 반공 이론가 더글스.하이드씨는 레닌의 말은 인용하여 『이론이 없는 실천은 맹목(盲目)과 같고 실천이 없는 이론은 불임(不姙)과 같다』고 한 것이 어찌 그들만의 전유물(專有物)일 수 있느냐고 하였다. 구태여 그들의 「슬로간」을 빌릴 것은 없다. 『나 설령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신앙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을진대 아무 것도 아니로다』(고린토 전 13.2) 이렇게 실천궁행(實踐躬行)을 강조한 말씀은 가멸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지식인일수록 실천력이 약하다는 말을 흔이 듣는다. 지식은 항상 이치를 앞장세우고 막상 행동하는데 가서는 꽁무니를 뽑는다는 뜻이다. 이런 비유가 만의 일이라도 우리에게 견준 그것이라면 우리는 모름지기 자기 신앙을 심각히 재검토해 볼 일인줄 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이성(理性)의 빛을 잘 밝혀서 때로는 철학적 고찰(考察)을 빌리면서 그리스도교적 진리를 탐구한다는 것은 장려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이성의 빛이란 것이 실은 하잘 것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암야에 켜든 등잔빛 한가닥의 구실이나 하면 고작일 것이다. 유한(有限)한 인간이성을 가지고 무한한 신의 세계를 샅샅이 보자는 그 생각부터 무엄한 노릇이다. 철학적 사색(思索)이란 것도 그 꼴을 넘을만한 것은 못 된다. 여기서 우리는 겸손이라는 자유와 의지(意志)를 구유(具有)한 인간의 가장 거룩하고 또 위대한 덕성(德性)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인가 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인식(認識)과 신앙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성의 범위와 계시(啓示)가 구획(區劃)되는거와 같다.
요즘 지식인들이 모인 교리반이나 특별히 학생회 등에서 얼른 이런 인상을 받는데 그들은 교리공부에 열중한 나머지 인식(認識)이나 이성(理性)의 작용에 너무나 편중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점은 직접 지도신부가 단임하고 있을 때는 적당히 지적되고 있지만 이같은 주지(主知)적인 경향은 경계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중국의 석학(碩學) 오(吳經웅) 박사는 동양의 신비사상(神秘思想)은 심오(深奧)한 종교적 진리탐구와 전혀 일치한다고 설파(說破)하였다.
이제 사순절도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이 방면에 눈뜨게 해주는 것이 있다. 우리의 인식(認識)의 한계를 넘어선 그곳에 계시는 천주님은 오직 그 무한한 사랑으로 인간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성 오그스틴의 말대로 『우리 마음이 천주를 향해서 (FORTHEE) 만들어졌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이 순간에도 천주를 대면(對面)하거나 아니면 배면(背面)하는 그 양면의 한면일 수밖에 없다. 그 향배(向背)가 이렇게 분명하 것이다.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조그마한 사랑의 갚음(인간은 천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을 애덕(愛德)이라고 한다. 그 애덕의 실천은 여러 갈래로 표현 표시될 수 있다. 그 어느 길이건 거기에는 반드시 희생이 동반되어야 한다. 희생은 곧 그 크기의(사랑의) 척도가 될 것이다. 우리는 가끔 저 거리의 복음전도인들을 보고 느낀 적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능변은 혹 사람들의 경탄을 차지할 수 있었으리라.
그들의 체면을 무릅쓰는 열성은 혹 감동을 줄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을 참으로 남의 마음을 힘있게 당길 수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줄(線)을 달아줄만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우리는 비록 입으로 성경구절이나 철학술어를 나열할 줄 모르는 과묵(寡默)한 자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애덕의 실천에 등한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애덕의 실천을 동반시키지 못하는 우리의 신앙이 극히 허약한 상태에 빠질 것은 고사하고, 가령 주지(主知)에 기울어질 때 『참 그네들은 말재주, 입심만은 좋더라』는 빈정거림을 받을 뿐이다. 이 얼마나 치욕적인 낙인이요, 우리의 오랜 전통을 욕되게 함이 아니랴.
이는 우리가 목표삼는 가톨릭 「악숀」의 태세(態勢)가 아닌 것이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 죽음에 머물러 있는 자니라』(요왕 13.14)
사순절 애긍시사(施捨)의 여행(勵行)은 우리 신앙에 불가결한 애덕의 행동인 동시에, 우리의 보람 있는 전통적 개성미(個性美)를 도야(陶冶)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