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서제앞 뜰에 상사초(相思草)가 만발(滿發)해 있다. 꽃생김새는 나리꽃 비슷한 것이지만 이 꽃의 특증(特徵)은 한개의 잎새도 달지 안고 대궁이만 땅에서 멀쓱하게 솟아 꼭지에 그 연연한 보라빛 꽃송이를 달고 있는 점이다. 잎새는 7월 중순에 이미 다 시들어 말라버리고 흔적조차 없다가 8월 중순경에 대궁이만 솟아올라 꽃송이를 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잎새와 꽃송이가 서로 그리워 한다는 뜻에서 누구가 상사초(相思草)라 명명(命名)한 것이리라.
과연 꽃송이의 연연한 품이 무엇을 애절하게 사모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듯도 하지만 그러나 상사(相思)라는 이 숙명적(宿命的)인 명명(命名)을 무심한 화초(花草)에 붙인다는 것은 어느 뜻에서는 인간들의 너무나 잔인한 취미를 뒤덮어 씨운 듯해서 오히려 애처러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지난해 시(詩)를 쓰는 모여사(某女史)가 四십이 넘어 첫 애기를 얻었다. 평소에 나와 친한 터이므로 굳이 내게 그 애기의 이름을 지으라는 부탁이 왔다. 무심히 부탁을 응낙하고 정작 작명(作名)을 하려니 쉬운 노릇이 아니다. 무슨 미신(迷信)같은 것을 저어해서가 아니라 아기에게 이름을 붇인다는 것이 너무나 내게는 엄청난 노릇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동화(童話)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천사(天使)가 하늘나라에서 어떤 잘못을 저지러서 추방을 당하여 이승으로 오게 되었다. 이승에서는 어느 임금님의 귀여운 딸로 점지되었지만 이 어린 공주는 자기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늘나라에서는 이름만 부르면 그 이름에서는 향기가 풍기는데 이승에서는 아무리 아름다운 이름일지라도 이름에서 향기가 풍길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공주는 「향기나는 이름」을 달라고 조르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다.
나는 몇번을 주지하다가 소연(召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대단한 뜻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소연」이라는 어감(語感)이 연하고 부르기에 과히 어색하지 않으며 이른 봄에 제비를 기다리는 마음이 희망을 뜻하는 것으로 고된 인생살이에 한가닥의 희망을 잃지 않고 꾸준히 살기를 비는 마음에서다.
모든 사물(事物)은 다 이름을 가졌다. 필자는 박목월(朴木月)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뜰에 자라나는 식물에는 그것대로 이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 이름이 아름답건 아름답지 못하건 이름은 그 사물이 아니라 그것을 대리하는 한갖 부호(符號)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상사초(相思草)라는 이름이 비록 상사초(相思草)라 불리우는 화초(花草)의 한갖 속성(屬性)의 특징으로 말미암아 붙여진 것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상사초(相思草)라 붙음으로 그 화초가 더욱 애련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이 무심한 화초를 우리가 상사(相思)라는 숙명적인 비연적(悲戀的)인 것으로 그 본질을 규정(規定)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두렵다. 우리가 아무런 이름을 가졌건 우리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편리하게 쓰이기 위한 한갖 부호(符號)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 자신을 대리 · 대표(代理 · 代表)하게 되면 이상하게 이름이 우리를 구속(拘束)하고 우리의 운명에 암시(暗示)와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환언(換言)하며는 우리는 「두개」의 「나」로서 존재하게 된다는 뜻이다. 즉 실지(實地)의 「나」와 그것에 주어진 명칭(名稱) -이름으로서 「나」 그러므로 비록 실지의 「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이름으로서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으로서 「나」는 온갖 편견(偏見)과 전설(傳說)과 허황한 뜬 소문과 곡해(曲解)의 덩어리로서 「나」를 대리 · 대표하는 가장 음흉(陰凶)한 존재라는 것을 사람들이 미쳐 깨닫지 못함으로 나를 대리하는 「이름」으로서의 「나」는 더욱 자기 마음대로 행세(行勢)하는 것이다. 이것이 실지의 「나」를 위협(威脅)하고 때로는 제멋대로 상(賞)을 타고 제멋대로 남의 집에 오르게 되고 험담을 듣게 되고 그것이 엄연하게 실지의 「나」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다. 실로 실지의 「나」는 행방(行方)조차 짐작할 수 없는 수없이 존재하는 「이름」으로서 「나」로 말미암아 두통(頭痛)을 앓게 된다.
朴木月(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