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주일을 앞두고 우리는 성주간(聖週間)에 들어서고 있다. 연중 가장 다채(多彩)스럽고 또 심오한 뜻을 표시해주는 많은 성전례(聖典禮)에 기도 및 행동으로 참여할 이 전례의 계절(季節)을 당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때에 전례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姿勢), 그리고 그 실정을 살펴볼만하다. 지난 제2차 바티깐공의회 제1차 회기(自1962년 10월3일 至 동 12월8일)는 전례변경에 관한 안건에 들어가서 제안된 동 의제의 전문(前文) 및 그 제1장을 통과시켰었는데 적어도 거기서 두 개의 사실이 밝혀졌다. 그 하나는 1947년 11월20일 발포된 교황 비오 12세의 전례에 관한 회칙(回勅) 「메디아똘·데이」가 광범위하게 인용(引用)되었음과 둘째는 각국 주교회의가 특정의 실행사항을 결정·선포한다는 것이다.
비 12세의 전례에 관한 회칙 「메디아똘·데이」는 전례 가운데서도 미사성제(聖祭)의 중요성이라기보다 그 중심성(中心性)을 강조하는 동시에 신심상(信心上) 관행(慣行)되고 있는 몇 가지 그릇된 생각을 경고한 것이다.
공의회가 전례의 어떤 부분을 변경 또는 결정하리라는데 구애받음이 없이 우리는 금세기 초부터 찬연히 일으켜진 미사를 중심한다. 전례운동(典禮運動)의 몇 가지 긴요한 문제들을 알아볼 수 있다.
①미사 중 사제(司祭)의 기도에 지장을 주지 않는한 될 수 있으면 소리를 합쳐 미사경을 드린다.
그 방법으로서는 전례의 규정에 따라 보미사자만이 응답하는 것을 일반신자들(會衆)이 함께 소리를 맞추어드리고, 사제가 「라띤」어로 낭독하는 성경 및 기구를 선창자(先唱者)에 의해 자국어(自國誘)로 읽고 또 회중이 응답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오로지 그 본당신부의 교육방침에 따라 실천될 일이지만 이것은 비교적 작은 성당 안에서만 잘 실행될 수 있는 것인가 한다. 이것을 합송미사 또는 대화(對話) 미사라고 부른다.
②미사봉헌시에 헌물(獻物)을 드리는 옛 관습을 잘 살려가야 한다. 미사에 나왔으면, 어떤 모양으로서나 자기 희생을 제단에 바칠줄 알아야겠다. 자기 희생의 상징(象徵)으로 혹은 교회가 원하는 거룩한 상버을 도울 수 있는 가벼운 연보전을 바친다는 것은, 이것은 오히려 한 「에띠께뜨」나 습성처럼 반드시 지켜야할 일인줄 생각된다.
③미사 중 부르는 성가(聖歌)에 관해서 미사 전례와 일치하는 「그레고리오」 성가만을 허용하는 「라띤」계 각국의 예도 있으나 우리는 자국어 성가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한동안 논쟁된 일도 있었다. 즉 미사전례와 일치하지 않는 자국어 성가를 미사 중에 부르지 못한다는 논거를 앞세운데 대해 현행 자국어 성가는 오래 불러왔으며 좋은 효과를 주고 있음을 지적했다. 어차피 이 문제는 더 많은 한국적인 연구의 여지를 남겨주고 있는 것이겠다.
④완전하고 통일된 「미사경본」이 있어야 한다. 이 미사경본의 출간에 대해서는 이미 권위 있는 출판이 마련되고 있는 것 같으며 공의회 후에 결정판을 내게될 것을 전제로 우선 수정판을 곧 내놓는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이렇게 간략히 살펴보더라도 우리의 중심사상(中心思想=그리스도敎的 生命)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생생하게 얻을 수 있는 이 전례문제가 얼마나 중대하며 또 적지 않는 숙제를 남기고 있음에 짐작이 갈 것이다.
전례를 통해서만 우리는 사제(司祭)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개자(仲介者)요 신자들의 희생이며 동시에 우리 구령의 근원인 것을 파악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올바르게 터득함으로써만 교회가 바로 지상의 천주의 나라(神國)인 것을 승복(承服)하고 그 나라의 영예로운 시민이 된 자부(自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전례는 곧 그 공동체(共同體)가 되는 성스러운 신심이요 행동이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전례 가운데 오직 천주께 향한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생활을 바치게되는 것이며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오직 완전한 사회적 및 공동적인 전례생활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전례의 본질적인 문제와 아울러 그 주변(周邊)의 문제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 때문에 거기에는 민속적인 연구도 절실히 요청된다. 우선 각국에서 실시되고 있는 전례주간(典禮週間) 등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이를 연차적으로 실행하는 가운데 점차로 모든 불비를 보완(補完)해갈 수 있고, 더욱 갈아 빛낼 수 있는 전례운동을 본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