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레지오 마리에 운동에 있어 초창기의 육성공로자로서 커다란 업적을 남기었고 『평신자의 사도』라 할만한 바오로 윤(尹相敦)씨의 죽음은 고인을 잘 아는 이들에게 충격을 주는 슬픈 소식이었지만 한편 인생의 목적과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알게된 한 영혼이 천주께로 나아가는 역정(歷程)에 있어 그 고된 인생사리 중에서도 얼마나 기쁘게 항상 감사와 만족으로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평범(平凡)한 것을 비범(非凡)한 것으로 변화케 하는 값있고 희망에 찬 천상적(天上的) 복락의 감미(甘味)를 맛볼 수 있었으며 마침내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關門)인 죽음을 겁없이 기쁘게 맞이할 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여 주었다.
1910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한 고인은 서울에서 교육을 받았고 실업계에 종사하다가 1949년 4월 16일 성세를 받음으로써 가톨릭교회의 품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고인은 신앙을 갖지 않았던 과거생활과 완전히 결별하고 새생활에의 탄생을 한 것이다 진리와 구원의 복음을 알게된 이상 이를 널리 전파하여야 하며 또는 믿는 바를 실천하여야 한다는 것이 생활태도였다. 6·25를 서울에서 겪은 윤씨는 1950년 12월 부산으로 피난갔으며 1956년 부산에서 레지오 마리에 운동을 처음 알게되고 또한 평신자 사도직을 안 다음부터 천직과 사명을 별견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가톨릭 액숀에 모든 정력과 노력을기울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해깊고 적극적 후원자 최요왕 주교님과 장요셉 부주교님 김아릭스 신부님들의 지도아래 동지요 협조자인 요셉 김(金甲寅)씨와 같이 손을 잡고 경상남도 일대와 경북지방에까지 레지오 운동보급에 앞장을 섰던 것이다.
가정형편으로 서울로 돌아가게 된 1959년 9월까지 3년간 직접 지도하고 설립한 쁘레시디움이 147개 꾸리아가 12개 행동단원 2천여명 협조단원 5천여명으로서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군세(軍勢)를 과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 순교복자수도회」 제3회원이었던 씨는 글자 그대로의 재속수도자(在俗修道者)였고 착한 표양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병상에서 보여준 영웅적이며 깊은 신앙적 태도는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해주고 있다. 본당신부님인 베드루 조(曺仁煥) 신부는 『 그의 생애는 전교만이 목적이었다… 그는 초인간적으로 활동하였다…』고 평하고 있음같이 씨는 순교선열을 볻받아 생활전체를 완전히 복음 전파에 바치려 하였다.
尹光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