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에 가서 자기의 육신이 금생에서 자기가 잡은 쥐새끼로 환생한다는 불교의 윤회설보다 더 소름이 끼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부활도리다. 『악인들의 육신은 추악하고 흉할 것이니라』고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간선자의 육신은 그리스도의 육신과 같이 사기은 을입어 아름다울 것이요』라는 도리는 망자를 생각할 때의 슬픔을 그리고 망자가 되리라는 공포를 극복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즐거운 도리를 가졌다. 그러나 간선자가 되기란 그리 수월한 노릇이 아니다. 특히 신변이 수월할 때가 오히려 수월치 않다. 그 대신 안 그럴 때는 반대로 제법 간선자가 될 희망이 날만치 열심해진다. 그런 뜻으로 군란 때가 간선자 되기가 오히려 수월했을 것이다.
사기은 이란 『상치 못함과 빛남과 빠름과 사마침』이니 기갈 병고도 없을 것이요 어둠이란 있을 수 없을 것이요. 인공위성도 쓸 데가 없을 것이요 「베르린」의 장벽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시시각각으로 치명을 각오한 이수의 절마옫 태연하고 자고깨는 군란 때 교우들의 마음 자세는 얼마나 태연했으랴! 사형을 각오한 죄수의 전망도 태연할 수 있다면 사기은의 부활 희망은 태연 이상으로 흠연했어야 옳을 것이다.
더 더구나 부활 때를 당한 그 분들의 즐거움이야 그 얼마나 컷으랴!. 그것은 치명이 예기되는 긴장감이 없이 해태하기가 쉬운 신앙 자유시대의 우리가 버릇으로 염하는 「알렐루야」에는 비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올해 부활에도 황사영의 「백서」를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이중배 말징은… 경기도 여주에 살았는데…마음이 대범하고 기분이 명랑하고… 열심하기가 불같고 남들이 눈치채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경신년(1800년) 부활축일에 개를 삶고 술을 걸러 한마을 교우들과 함께 길가에(삼중의 작은 길) 모여앉아… 높은 소리로 「희락경」을 외우고 바가지와 술통을 치면서 장단을 잡아 노래를 부르고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씹고 마시고 나서는 또 노래 불렀다. 이러기를 날이 맟도록 했다. 영혼 준비는 언제든지 다 되어있는 것이다. 조만간에 닥칠 치명은 이미 각오한지 오래다. 사순절의 극기와 보속도 힘껏다한 끝에 맞는 부활 첨례다.
그러나 모여 앉을 성당도 없고 미사를 지내 성체를 영해줄 신부도 없고 힘껏 잡아 울려칠 종도 하나 없다.
그런대도 희락경을 속으로 외울 때 들뜨는 즐거움을 어이 참으리!.
큰 소리를 질러 외우고 싶은 충동을 어이 누르리!.
『에라! 모두들 따라오소. 뒷산으로 들어가세. 이만큼 왔으면 될 걸세. 아무도 엿보는 놈은 없었지. 자, 길가에 둘러들 앉게.』
약차하면 피신하기가 쉽도록 길가에 자리잡는 것이다.
군란 때 교우들의 생활이란 늘 피해다니는 것이 주장이었을 것이니까. 그러나 그 분들의 속셈에는 설사 붙들리드라도 주의 안배라는 최후의 각오가 무언 중에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미련은 추호도 없다. 그 분들의 영혼은 잠시 육신을 떠나기도 했을 것이다. 일종의 탈혼상태를 지극히 짧은 순간이라도 겪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야 어쩌면 그처럼 담대하게 즐거웠을 것인가! 그분들의 속 마음은 이미 낙원이었음이 틀림없다. 바로 INTERIOR CARMEL이었음이….
올해도 서양식인 EASTERECC 대신에 민족적으로 EASTER DOG(독湯) 국을 먹자는 것이다. 영성적으로는 가당치도 않지마는 적어도 생리적으로만이라도 163년 전 경기도 여주땅 산중의 부활 잔치에 한몫 끼어보자. 개고기 맛이야 그 분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일 것이니까.
그러나 이중배 일행은 그 즐거웠던 잔치가 들켜 잡혀가 치명을 했다. 황사영은 그 잔치의 즐거운 이야기를 전한 백서가 들켜 그 이듬해에 묶여가 치명을 했다.
바로 그 분들은 이제 천상에서 자기들이 처참한 군란을 당하던 나라에 영광의 성직계통(聖職階統)이 수립되어 공의회의 교부들이 제2차 총회를 앞두고 있는 올해의 부활을 특별히 즐거워하고 있을 것이다.
김익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