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풍토(風土) 고유의 청명함과 계절이 안겨주는 뭇 감상들은, 9월을 택하여 순교자 현양(顯揚)의 달로 삼은데 더한층 감개를 자아내게 해준다. 9월 26일은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루 대성전에서 영광의 복자위에 올림을 받은 79위 우리 순교복자들을 기념하는 축일인 동시에, 1만여 모든 치명자들에게 자손될 정성을 한꺼번에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
저 「떼르뚤리아누스」 의 말과 같이 「너희 박해자는 우리(순교자)를 십자가에 달고 고문하며 때려 죽게하라. 너희 하는 짓이 격심할 때 우리는 큰 효과를 걷는다. 실로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씨이니라.』고 한 것은 이 땅에서도 적중하였다.
결실(結實)이 좋은 것을 보면 쉬이 그 씨(種)를 알아볼 수 있듯 즉 1만여 귀중한 순교의 씨는 오늘 53만의 장한 열매를 맺어 놓았다. 우리는 그 보람의 기인을 모두 치명하신 선열에게 돌리기를 주저치 않을 것이다.
연풍 우리는 많은 성인들의 축일을 기념하고 국가적으로도 존경할 인물 및 기념할 축제일을 맞이하고 있다.
그것은 앞서간 그분들의 유덕을 사모하고 공덕에 사은(謝恩)하는 뜻과 아울러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서는 선인(先人)으로부터 물려받은 유형 무형의 유산(遺産)은 곧 오늘을 실현해준다는 것을 맹백히 증명하자는 것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오늘이 곧 역사적인 현실인 것을 증명하자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뜻을 새겨볼 때 전통 및 신앙의 유산 등을 전혀 무시하고 기계적(機械的)인 사회개조나 문화의 창조를 호언하는 각종 유물사상(唯物思想)에 대하여 오직 우리의 치명선열들을 공경하는 빛나는 정성만이 값있는 대답을 보내줄 수 있는 것인가 한다.
순교자 현양의 달을 지내고 79위 복자축일을 기념하는 신앙적 가치(價値)는 교리에 명시되어 있음과 같다.
그외에 이의 정신문화 및 사상적 의의(意義)도 귀중한 것이다. 포악한 일제(日帝)의 탄압은 가위 한민족의 얼을 바꿔치기 할 수 있을만큼 철두철미 했었다. 그 당시 제 고향을 찾듯 제 얼을 되살리듯 회상한 것은 곧 우리의 이 순교성월 및 복자첨례였던 것을 기억할 수 있으리라. 이런 기억만으로도 그 정신성 및 사상성만으로도 그 정신성 및 사상성(思想性)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앞날을 생각해 볼 때 일제의 식민정치 같은 탄압과는 달리 참으로 복잡미묘한 그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사상이란 그것이다. 진리를 수호하여 목숨을 던지는 순교의 정신을 알아들을 수 있는 감수성(感受性)도 상실되고 있음을 본다. 지나친 기우같지만 주위에서 쉽게 감득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 원인을 단지 사회풍조(風潮)에만 돌릴 수는 없다. 가령 모처럼 맞이하는 복자첨례 당일만 하더라도 거의 형식적인 강론에 그것을 보충할만한 행사가 그밖의 분위기 등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말하자면 순교정신을 들을 만한 기회와 장소가 없는 것이다. 옛 어른들은 순교담을 곧 잘 들려주었다. 편편이 듣는 그 정도만도 훌륭히 전해져 갔었다. 지금은 그런줄마저 완전히 끊어지고 달리 손에 닫는 출판물이 흔한 것도 아니다.
다행히 순교자 현양회가 있어 가진 애로를 무릅쓰고 많은 사업을 추진시켜가고 있다. 순교자 현양회는 많은 포부와 기획을 포용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한 교구의 소속단체가 아님을 자각하고 전국적인 계몽 및 정성을 모으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현양회의 업적과 권위는 일반사회와 문교부나 대학 및 문화단체로부터서도 관심과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한 협동을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순교자 현양회의 많은 업적에 존경을 보내고 앞날에 더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도처에 흩어져 있는 순교의 유서가 있는 곳은 반드시 잘 가다듬어져야 하고 거룩한 장소로 표시되어야 하겠으며 적어도 한곳의 순례성당이 건립되어야 한다. 그같은 순교자 순례성당은 전국의 소속이 되어야만 한다. 순교사(巡敎史) 분야에 있어서도 더 많은 정확하고 권위있는 연구가 장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현양사업을 추진해가자면 한편으로는 조리있는 그 단체가 확립되어야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전국신자의 정성어린 협조가 있어야 할 줄 안다.
순교의 정신은 결코 한시대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음은, 우리는 날로 순교의 정신으로 자신을 무장(武裝)할 급박한 현실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