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6일자 귀보에 「달콤한 공상」이란 제하에 실린 윤형중 신부님의 짤막한 글을 읽고 평소부터 지녀오던 나의 생각을 적는다.
전세계적으로 손을 꼽을 만치 우수한 전교지방이라는 우리의 실태가 얼마나 한스런 것인지는 윤신부님의 글에서도 보는 바이다. 신부님의 말씀대로 (서울의 예로) 십만의 자연인구 증가에 겨우 7천명의 신자증가를 가지고 전교가 잘 된다고 안심하고 있는 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실정이 아닐가? 심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또 그렇다고 하더라도 7천명의 신자가 증가했으면 적어도 3개의 성당이 매년 늘어야 함이 정리(正理)가 아니겠는가. 비었던 성당의 자리가 메워진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현재 부산(釜山)보다 배 이상의 인구를 갖고 있는 서울의 성당 수가 부산과 비슷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의 하나이다. 이런 현상은 서울만의 일이 아니다. 어떤날 신학교의 신부님을 만나 2·3년후면 적어도 매해 3·4십명의 새 신부님들이 배출되리라는 말을 들었다.
기쁜 일이요 천주님의 특별한 강복이다. 그러나… 지금 같아서는 그 천주님의 강복으로 목자가 되신 새 신부님들을 모실 일터가 없을 것만 같다. 한심스런 일이다. 이제 2·3년후면 목자가 부족해서 전교를 못한다는 핑계마저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자그마한 동리라도 들어섰다 하면 금시 솟아오르는 예배당을 우리는 수시로 보고 있다. 한 예배당의 신도수는 불과 백명 2백여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프로테스탄트의 선교사가 이 땅에 첫발을 디딘 것은 불과 80년전의 일이다. 지금 그네들의 총수는 백만을 훨씬 넘고 있으리라. 한편 이 땅에 천주님의 참된 복음의 씨가 뿌려진 것은 4세기 전의 일이요 조선교구의 설정이 1831년의 일이고 지난 봄에는 교계의 설정까지 보았다.
우리의 교회사를 펼쳐보면 장마다 피로 아로새겨진 그 혹독한 박해중에도 대원군(大院君)의박해 전에 2만 내외의 교우가 있었고 대원군의 모진 박해로 그 수가 1만2천여로 위축되었었으나 전교의 자유가 허용되고 15·6년후 1900년에는 4만2천여명이란 전교실적을 올렸던 것이다. 만일 이때와 같은 비례대로 전교가 계속되었더라면 1960년에는 3백만의 신자가 이 강산에 퍼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50만의 신자를 갖고서 유수한 전교실적을 올리고 있다고 믿고 있다.
왜 우리는 우리와 똑같은 여건하에서 전교한 프로테스탄을 따르지 못하고 있으며 숫한 악조건 하에서 전교한 우리의 선조들에 뒤지고 있는 것일가?
윤신부님은 일반신자들의 교리지식 증진과 전교해야된다는 깊은 인식을 강조했다.
지극히 타당한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의 대부분이 전교에 무관심하다고 한다면 나의 실언일가?
자기 성화를 통한 전교를 목적으로 조직된 훌륭한 단체 레지오 마리에도 무슨 유행처럼 그 빛과 힘을 잃어가고 있다면 나만의 독단일가?
전교해야 된다는 사상의 결함 곧 전교에 대한 무관심은 전교단체를 활용 할 수 없을 것이다.
앞서도 말한 바 성당이 연이어 세워지지 않는 것도 이러한 무관심의 뚜렷한 증거이다. 전교의 무관심 그것은 곧 한국천주성교회의 사멸이요 신자의 자살행위라면 지나친 말일가? 이 점에 있어 엄격한 반성과 재검토가 있어야 되리라고 감히 필자는 생각한다.
윤신부님의 「공상」 은 그 얼마나 현실적인 「공상」인가! 우리 50만 신자가 모두 이런 「공상」을 갖게된다면 우선 요긴한대로 서울에 60개의 성당을 짓고 또 이런 비례대로 남한 전역에 5백개의 성당을 세우고 방방곡곡에서 천주를 찬미하는 소리 울리고 하늘과 땅을 연걸하는 신비가 이루어지는 천주님의 복받는 민족이 되는 것은 바로 눈앞의 일이다. 이 얼마나 「달콤한 공상」이냐!
송사일(서울 惠化洞본당 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