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날, 어린이 날 그리고 가정주간(5월5일부터 11일까지)이 예년대로 전국적으로 거행되었다.
선행 어머니, 어린이들이 정부의 표창과 국민적 칭찬을 받고 있는데 그들의 드러난 선행은 참 눈시울을 뜨겁게 해준다. 그 반면 거의 매일같은 신문사회면의 소년범죄, 가정비극 일가족 집단자살 거기다가 최근 연달아 발생하고 있는 어린이 유괴사건은 실로 전대미문의 괴상한 범죄양상이며 잔인을 극(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어린이를 유괴해다가 교통사고로 가장하고 죽여가지고는 위자료를 요구한 따위는 최대(稀代)의 것으로만 돌리더라도 목불인견(目不忍見)의 폭행, 추행사건 등은 그칠줄 모르고 있다. 당국이 발표한 숫자에 의하면, 서울 일원에서만 소년범죄 「그룹」은 174개요 그 소속된 수효는 5천6백여 명을 해인다고 한다. 그들이 시장, 극장, 번화가를 근거지로 온갖 폭행 공갈 협박 등 갖은 행패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전국 고아원에 수용된 10세 미만의 고아의 수효는 62년말 현재 6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들은 비록 거리의 소년들과는 다르겠지만, 마땅히 받을 부모와 가정의 따뜻한 정과 보호에 줄이고 있음은 더 말할 것 없다.
이에 경종을 울리고 그 대책을 부르짖는 소리만은 대단히 높다. 신문의 소론(所論)을 들어보면 당국이나 사회적인 대책이 서야 한다고 하고, 교육 내지 사회심리(社會心理)의 높은 이론을 쳐들고 있음을 본다. 『빈궁의 구렁이에 빠져 해매는 사람들이 길을 잡지 못할 때 타인에 대해서는 잔인한 행동을 감행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자기 학대의 병적인 심리상태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이 결국은 생활난과 절망에 기인한 심리적 열등의식(劣等意識)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보면 범죄의 뒤에는 그 대부분은 「가난」이라는 탓이 있다는 것이 된다. 일면 수긍할만한 것이 없지 않는 줄 여겨진다.
그러나 「가난」에 모든 탓을 돌릴수는 없다. 또 그렇게 귀결짓다가는 전혀 근본적인 원인을 찾지 못할 위험성도 있다. 또한 가난은 일조일석에 해결될 수 없으며 가난을 풀었다고 해야 그 문제도 해소되지는 않는 법이다. 그 때문에 언필칭 가난을 앞장 세우는 일은 문제에 임하는 너무나 안일한 태도로 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의 교육 및 사회적 결함을 들출만한 여유를 가지지 못하거니와 우리는 항상 근본(根本)을 무시하고 지엽(枝葉) 말단을 잡고서 그것도 극히 천박하고 피상적인 관찰을 해왔음을 심각히 반성할 일인 줄 안다. 아동헌장(兒童憲章)을 보면 어린이의 권익(權益)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 아동헌장의 정신을 잘 터득하는데도 좀 더 근본적으로 소급해가야만 한다. 가령 한편으로는 아동헌장 운운하면서 한편으로는 가족계획의 이름으로 산아제한은 고사하고 쉽게 유산(流産) 행위를 감행하고 있어 관계 법조(法條)는 거의 사문화(死文化)된 실정에 있다. 이것은 곧 어린이의 출생의 정당한 권리를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가정 비극 사회불안 및 나가서는 모든 범죄의 직접 간접의 원인을 장만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의 가장 큰 권리는 아무래도 출생할 권리이겠다. 여기서부터 여지없이 무시당하고 있음에 주목할 일이 아니겠는가? 혹 현실적인 아동의 사회적 문제와는 촛점을 벗어났다고 할지 모르나 적으도 우리는 이런 근본적인데서 아동의 엄숙한 인격적 권리를 찾아갈 필요성이 있는 줄 안다.
사실 후진사회 또는 윤리력(倫理力)이 쇠퇴한 곳 치고 아동의 권리가 잘 보장되고 있는데는 없다. 아동의 권리니 하는 딱딱한 말 보다 우선 업수이 여김, 욕질, 매질, 버림과 같은 아동 학대를 즉시 지양할만한 강력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우리의 본당에서 쉬히 목격할 수 있는 것은 강론, 교리, 그리고 성당 안에 앉는 곳가지 무엇이든 어른 본위로 되어있고 어린이들을 위한 배려가 별로 없는 것이다. 이런 점은 곳 시정되어야 한다. 본당의 형편이 닿는대로 어린이들이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간단한 모임이 마련되면 좋을 것이다. 이런 어린이 모임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강습을 받을 필요가 있다.
아직 이 방면의 선도적(先導的) 인물과 기관이 없고 주동을 취한 분이 없다. 가톨릭 아동 문학은 아직 그 일므을 달만한 지경에 있지 않으며 그 방면의 운동과 헌신할 인물이 아쉬울 뿐이다. 요컨대 근본적인 데서 이 문제를 다루어갈 조심성이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