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전문가 M신부에게 가톨릭신문은 왜 다른 신문처럼 잘 읽혀지지 않는가? 신자들이 일반신문은 놓치지 않으면서 가톨릭신문을 경원하고 있으니 무슨 연고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야 일발 신문처럼 필요하고 재미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결론이 될 수 있으냐고 반문 했더니 그것은 지극히 피상적이요 표면적인 이유라고 밝히는 것이었다. ▲신문을 내고 있는 자의 입장에서, 필요하면서 아기자기한 것을 꾸며 보겠다는 생각은 버릴 수 없는 욕망이다. 그런데 그것만이 그전적인 이유가 아닌 것 같다. 먼저 가톨릭 생활이란 뜻을 생각해본다. 생활은 유기적(有機的)이요 전반적인 것이다. 가톨릭을 신봉(信奉)한다는 거와 사고(思考)한다는 것은 구분(區分)될 수는 있어도 분리(分離)될 수는 없다. 『구분은 반드시 분리가 아니라』는 원칙에 선 것이라고 할까. 마음으로만 신자이고 머리로는 신자가 아닌 전혀 딴 사고(思考)의 방향을 지니고 있다면 대단한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는 셈이다. ▲주일 그것도 성당 안에있는 동안만 신자이고 성당 밖에서와 다른 6일간은 신자인 것을 까맣게 잊어도 좋을까. 이것 역시 자기모순을 스스로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순을 제거해주고 거기 눈뜨게 해주자는데서 가톨릭 생활관(生活觀)이 크게 강조되어 온 것인가 한다. ▲가톨릭출판물이 「베스트 셀러」로 등장하고 한국 문화 사상계에 공한할 만한 것을 내놓치 못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한국에서의 가톨릭 「저날리즘」이 훌륭히 완성된 것도 아니다. 그 미숙(未熟)하고 폭 좁은 것을 이루 다 말할 수는 없다. ▲이런 탄식을 하기에는 우리는 아직 젊고 어리다. 비오 12세는 가톨릭이 가톨릭(=공번된자)이기 위해서는 영화 · 연극 · 문화 「스포오츠」 「저널리즘」 음악 · 미술 그리고 라디오 · 오락 등 만사를 그리스도교화 해야 한다고 했다. △요컨데 우리는 반쯤만 가톨릭인 자신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마음만 신자이지 머리는 신자가 아닌 분열된 자기인 것을 곧 느낄 수 있다. △가톨릭신문 몇장을 더 팔자는 속셈인 것 같지만 옳은 생활관을 제시하자는 의욕에 찬 지면의 성심만이라도 제값대로 사주기를 간청하고 싶다. 가톨릭신문은 신자들의 성원으로서만 성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