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깐 공의회는 역사적인 그 막을 올렸다. 우리는 지금 막을 올린 무대를 바라도듯 우리 모두가 공의회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호부터는 공의회 관계기사로 지면을 채워보려 했으나 겨우 개회당일 것을 입수할 수 있었다. 우리가 통신을 받는 경로로는 로마에서 뉴욕으로 타전(打電)되면 그것을 정리한 통신사가 본사에 항공우송하기까지는 5일간은 걸린다. 거기다가 우리는 한주일 앞당겨 다음주일호를 내고 있으니 속보(速報)의 맛을 부릴 수는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일간 통신 · 신문 등은 첫째 공의회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용어에도 적절하지 못한 것이 허다함을 발견한다. ▲공의회 기사에 일종의 호기심 같은 것, 무슨 획기적인 변동을 기대하는 것, 일간 통신 · 신문이 흔히 범하는 과장선전을 바라서는 안된다. ▲공의회 개회 수일전 요안 성하께서는 갑작스리 기차순례여행을 하겠노라고 말씀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것도 「바티깐」을 출발 「로레또」 「앗시지」를 경유하는 400마일 긴 여정이었다. 「바티깐」궁을 들여다보면 장난감 같은 정거장에 전연 사용하지 않는 객차들이 녹쓸고 있다. 교황께서 기차여행을 떠나는 날 수많은 신문기자들이 전송나왔었다. 그들은 보고 『당신들이 오래 살아야 또 다른 교황이 기차여행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이말을 받아 누가 『성하 교황의 기차여행은 꼭 백년만입니다』고 하니까 교황께서는 『그게 꼭 내가 말하려는 뜻이었어』라고 했다. ▲제1차 바티깐 공의회 이래 10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그간 세상은 과거 1000년보다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00년전 교황의 속권(俗權)을 철저히 제한하고 교황을 「바티깐」에 유폐(幽閉)시킴으로써만 새 시대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정치사조 정책들도 양대전으로 퇴조하고 말았다. ▲세니(伊) 대통령을 선두로 400마일 연도(沿道)엔 『비바 일 빠바』(교황 만세)가 그치지 않았다. 민중에 끝없는 미소와 축복을 보내는 교황님, 동서 현인 · 성인들을 만조(滿朝)하고도, 공의회 성공을 위한 기구는 더욱 필요했었다. 기구가 그렇게 필요한 것이었던가, 기구에 힘 입지 않고서는 공의회도 성공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