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의 지성월간잡지로 평가를 받고있고 또 스스로 그 권위를 과시하기도 하는 S지를 잡지라는 테두리에서 볼 때 퍽 낡은 인상을 가진 것으로 대해 왔었다. 거기 즐비한 글들이 별로 「오리지날」한 것 같지 않고 한국 내지 향토를 배경으로 한 독창적인 연구가 엿보이지 않는 때문이기도 했다. 시사성(時事性)을 지닌 것도 뒤늦은 번역물 정도이요 그 논조(論調)의 일관성에도 의심하는데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도 종교의 입장을 떠나서 그를 편협하지 않는 심정으로 바라보면 결코 공자와 다른 범주에 속하는 인물이 아닌 것을 느끼게 한다. 그는 누구에게서나 배웠고 무엇에서나 배운 사람이었다. 한 마리의 새 한 떨기의 꽃에서도 씨뿌리는 농부나 천한 창기에게서까지 진지하게 인생을 배우고 또 생각한 것이다. 그는 나라 없는 슬픔 속에 가장 큰 나라를 이룩하였고 쪼들리는 가난 속에 가장 큰 부(富)를 이루는 길을 배우고 또 발견했다. 꼬마다.불타도 쏘크라테스도 다같은 테두리 안의 사람들이다』(=인생을 살려고 하는 사람) ▲이 글을 하나의 수필로 보기에는 그 안에 포함된 사상이 너무나 중대한 것을 느끼게 한다. 이쯤되면 앞에 말한 별로 「오리지날」한 것이 없다고 한 말을 곧 취소할 용의가 있다.
왜? 이 글쓴 분의 종교 및 교회의 무용(無用) 사상은 공산권을 제외한 자유 세계에서는 참 희귀한 존재이며 그렇게 매력 있는 글은 읽는이로 하여금 주사약을 흡수하듯 해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사상을 취급한 잡지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해준다.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우리의 문화 및 더구나 사상의 세계에서 그 어떤 주관을 논하긴 자유의 방식과 또 그 목표도 자유를 지향해 갈 수 있다는데 탓할 길은 없겠다. 그러나 이런 기이(奇異)한 사상을 전할 때는 좀 더 보편적인 사상을 한편에 실을만한 편집자의 관용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 때문에 사상을 취급하는 사람 및 그 도구(道具) 즉 신문·잡지·방송 및 영화 그리고 문화 전반에 걸쳐 우리의 면밀한 관찰과 거기 대응할만한 공작(工作) 활동이 긴요한 것이다. 이렇게 정면의 도전을 받고도 외면만 하고 있을 수 있는가.